당신이 윤서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의 노래를 듣거나 무대를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첫인상은 동네 막걸리집 아저씨 같다. 그러나 조용히 눈을 감고 윤서의 노래만 듣는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예전에 막일 하면서 노래 부를 때는 제가 직접 트럭에 장비를 싣고 다녔어요. 이것저것 악기 설치하고 있으면 행사 관계자가 잡부인 줄 알고 저한테 이것저것 막 시키기도 했죠. 나중에 무대에서 내려오면 진심으로 사과하곤 그래요. '다들 외제차만 끌고 오는데 트럭 타고 오는 가수는 처음 봤다'고. 하하."
윤서는 데뷔한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1979년 LP 앨범 '이별은 왜 하고서'가 그의 데뷔곡. 1980년대에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학로 실력파로 꼽혔다. 이후 고단한 삶에 가수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진 못했다. 그럼에도 라이브 카페에서 그는 정태춘을 떠올리게 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요즘에는 '전속계약 하자'는 제의를 많이 받아요. 그런데 난 아직 자유로운 몸으로 음악하고 싶어요. 회사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기계적인 음악을 할 수밖에 없죠. 돈은 좀 적게 벌어도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윤서의 대표곡은 2011년 발표된 그의 3집 수록곡 '사랑아 사랑아'다. 울림이 큰 노래다.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떨림이 가슴을 파고 든다.
'사랑이 머물고 간 그 자리엔 내 가슴 아파오고/ 바람도 쉬어가는 그 자리엔 눈물만이 흐르네'란 노랫말에서 들리는 그의 음색은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듯 떨어지지 않는 겨울나무 잎사귀 같다. 쓸쓸하고 진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실제 제 이야기죠. 사랑했던 여인과 끝내 이루지 못한 결실이랄까. 지나고 나니 더욱 생각나고 간절해지고 그런 마음? 그렇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상처가 너무 깊어요. 추억으로 남는거죠. 누구나 다 그런 경험 있잖아요. 어떤 팬 한 분은 '사랑아 사랑아'를 듣다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염없이 울면서 갔다더라고요."
"살기 팍팍한 세상인데, 밝은 곡을 만들어서 팬들을 웃게하고 싶었어요. 우울한 발라드나 포크 음악만 하다 보니, 팬들도 이제 좀 재미 있고 경쾌한 곡 좀 만들어 달라 부탁하시더라고요.(웃음) 덕분에 공연장에서 반응이 좋네요."
'삐리리'는 '우차! 우차차! 웃차! 우차차! 우!우!' 하는 추임새가 신 나고 독특하다. 그 뒤에는 '어제는 날라리같이 오늘은 삐리리같이/ 내 모습 꾸리리같이 비리비리한' 가수 윤서의 자조가 섞여 서글프다. 전작 '사랑아 사랑아'의 연장선상에 있는 곡이다.
"이리저리 치이면서 한 여자만 사랑했지만,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혹시나 해서 노력하는 남자의 이야기죠. 제 현실이 그래요.(웃음) '우!우!' 추임새는 그 남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응원의 목소리입니다. 틀에 박힌 멜로디는 싫증나잖아요. 기존 작법을 깨봤어요. 마음에 드시나요? 하하.'
기자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방송 전파를 타지 않으면 온전히 목소리로만 노래를 알리기 어려운 세상이다. 기획사의 홍보 도움 없이는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그는 노래 외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 유지가 어렵다. 가수 본연의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강원도 원주에서 조그마하게 운영하던 라이브 카페도 문을 닫았지만 그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케이블TV 등 그를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지만 그에게 지상파 출연은 '하늘에 별 따기'다.
"얼굴 없는 가수로 남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얼굴이 알려지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정말 힘들어요. 12년 전 즈음 회의감도 들고 건강도 좋지 않아져 한 3년 정도 치악산에 은둔해 살다 보니 세상물정을 몰랐죠. '산 속에서 자기 음악만 하기에는 아깝다. 돌아오라'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돌아오긴 했는데, 막상 어디를 가도 돈이 필요하긴 하더라고요. 다음 앨범을 내기 위해서라도."
그가 '뽕끼' 가득한 노래 '삐리리'를 들고 나온 솔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행사 무대에 자주 서려면 슬프고 애절한 곡보다 흥겨운 노래도 한 곡쯤 있어야 했다. 어차피 그는 민요·트로트·발라드·포크·록 등 장르를 가릴 필요 없는 절대 내공의 '고수'다. 다만 그의 변신을 마뜩지않아 할 오랜 팬들이 염려됐다.
"발라드를 좋아하는 분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아요. 노래처럼 조용하고 잔잔하죠. 사실 처음에는 걱정도 하긴 했어요. 다행히 박수 쳐주는 분이 더 많습니다. 가수가 무대에 서지 못하면 아무리 곡이 좋아도 들려드릴 수가 없잖아요. 더 좋은 곡, 더 즐겁고 행복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은 제 마음을 팬들이 알아주시고, 아름답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하죠."
"지금의 성인가요는 가장 빠른 속도로 외면 받고 있어요. 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안주하거나 혹은 어떠한 공식을 답습하려는 가수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수준 미달의 가수들도 우후죽순 나오니까 팬들의 실망도 커지고 기대치도 점점 낮아지는 거죠."
그는 음악을 독학으로 배웠다. 그의 나이 20대에는 '그저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했다. 30대에는 라이브 카페에 오는 손님들이 원하는 곡을 했다. 40대가 넘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노래라고 생각한단다. 그는 "배운 것이 적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노래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3분 50초짜리 드라마를 쓰는 거예요. 요즘 전자 기계가 잘 만들어져서 다들 너무 쉽게 노래를 만들어 내는데, 전 그것 반대입니다. 한 곡 한 곡 노래를 낼 때마다 무섭고 두려워 해야 해요. 입으로만 부르는 노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노래하고 싶지만 그런 가수는 되지 않으려고요. 아무리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고집 하나는 끝까지 지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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