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터틀넥 셔츠와 회색 체크무늬 수트 패션. 포마드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헤어와 옅은 호피무늬 뿔테 안경. 게다가 여유로운 미소까지. 품격있는 신사의 등장이었다. 19일 서울 압구정 엠아카데미에서 만난 김범수는 정말 ‘비주얼 가수’였다.
그는 “잘 생겨서 비주얼 가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 애칭을 얻고 나서 자신감이 생기고 힘이 난다”고 쑥스러워했다.
최근 케이블채널의 코미디프로그램에서 ‘비주(류)얼(굴), 삼라만상 오만상’이라며 웃음의 소재가 됐던 김범수. 그는 “최근 외모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며 “예전에는 남에게 비춰지는 모습에 별로 신경을 안 썼다. 이젠 의상도 신중히 고르는 등 적어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무대에 서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대중들이 우스갯소리로 붙여준 별명이 그에게 진지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대중이 바라보는 김범수’와 ‘김범수가 생각하는 김범수’는 이처럼 다르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김범수는 21일 발표하는 정규 8집 앨범 ‘힘(HIM)’을 통해 그간 자신이 해왔던 음악과, 원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의 경계선을 확실히 그었다.
“김범수는 발라드로 각인된 가수죠. 지금까지는 보컬리스트로서 역량을 보여준 활동이었고요. 내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보편적인 내용의 노래들을 해온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요. 한 번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30대 중후반인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고, 늙지도 젊지도 않은 지금을 놓치면 최근 유행하는 음악적 경향을 반영한 이번 앨범의 의미를 전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강수를 뒀다. 김범수는 “대중들을 위해 지금껏 맞춤서비스를 해왔다면, 이번엔 내가 대중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변화겠지만 제 입장에서 보면 ‘회귀’라고 할 수 있겠네요. 8집을 통해서 원래 내가 좋아하는 것, 해보고 싶었던 것을 했을 뿐이니까요. 대중들은 이런 속사정을 모르니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하. 다만 음악적으로 인정받고 싶을 뿐이죠. 변화나 시도라는 말에 대중들은 반감을 많이 가지겠지만,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무리수를 던졌어요.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음악인생을 살찌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루’ ‘보고 싶다’ ‘제발’ ‘끝사랑’ ‘슬픔 활용법’ 등 그간 김범수가 해온 노래는 전형적인 감성 발라드다. 이 노래들이 김범수를 김범수답게 표현하는 대표곡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자신이 생각하는 김범수의 음악은 ‘흑인음악’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그는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거기 특화된 내 보컬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앨범에서 창법의 변화는 음악적인 변화만큼이나 큰 부분이에요. 창법 자체가 기본적인 한국형 발라드 창법과는 완전히 다르죠. 베이스는 흑인음악입니다. 발라드가수로서 지금껏 만들어 놓은 것보다, 어렸을 때부터 연습하고 즐겼던 창법들을 이번 앨범에 다 쏟아 부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발라드 가수로서의 옷을 입기 위해 몸을 움츠려야만 했던 한이랄까···. 이번 앨범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즐겁고 신나는 작업이었어요.”
이번 앨범에는 총 13곡이 수록됐다. 타이틀 곡은 3번 트랙인 ‘집 밥’이다. 하지만 원래 타이틀 곡은 ‘욕심쟁이’였다. 왜 바뀌었을까.
“‘욕심쟁이’는 1년 정도 준비를 했던 곡이에요. 또 굉장히 파격적인 노래죠. 업템포 곡을 처음 시도했어요. MBC ‘나는 가수다’에서 ‘님과 함께’를 불렀을 때 대중들이 ‘김범수가 저런 곡도 한다’고 평가했었거든요. 그 때 아주 기뻤어요. 깊은 감정, 슬픈 애잔함도 있지만 김범수가 보여주고 싶었던 트랙이 바로 ‘욕심쟁이’인 거죠. 하지만 ‘욕심쟁이’를 완성했을 때는 여름이었어요. 계획이 틀어지며 겨울이 찾아오자 노래와 계절감이 맞지 않았죠. 그래서 타이틀 곡을 바꿨어요.”
‘집 밥’은 힙합듀오 긱스와 어머니 이희선 여사가 피처링으로 참여해 화제가 된 노래다. 어머니의 집밥을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사에 쓸쓸하면서도 따뜻함이 묻어난다. 긱스의 감미로운 랩이 진한 감성을 더한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진땀을 뺀 끝에 겨우 녹취할 수 있었다. 김범수는 “녹음실 부스에서 스피커폰을 켜놓고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집밥을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자꾸 다른 대답이 나와 골치아팠다”고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했다.
“자꾸 아빠랑 벌초가야 한다고···. 푸하하하. 유도심문 끝에 ‘집밥 해줄게, 와’라는 대답을 들었죠. 대화 내용을 편집해서 어머니 허락없이 그대로 사용했어요. 나중에 노래를 듣더니 다시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소녀병’이 있으셔서요 하하. 여자는 항상 예뻐 보이고 싶잖아요. 아무튼 재녹음은 제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으니까요.”
음악 앞에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도 꿈쩍 않는 정신, 이것이 김범수의 ‘프로정신’이다. 하지만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후배가수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어머니를 향한 ‘단호함’ 보다 후배들을 향한 ‘친숙함’이 더 필요했다.
“저는 최신 유행을 이끌어가는 가수는 아니어서 젊은 피가 필요했어요. 곡 작업과 작사는 거의 제가 했지만 공동 작업도 많이 했어요. 트렌드를 이끄는 젊은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제가 놓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챙기고 싶었어요. 20대 초중반이 생각하는 문화를 이해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신선한 작업이었어요. 게다가 요즘 젊은 친구들은 선배 앞에서도 위축되는 모습이 없어서, 같이 작업하면서 오히려 제가 에너지를 많이 받았죠.”
모든 수록곡에는 김범수 자신의 인생을 담았다. 김범수는 “지금까지 순애보 김범수였다면 이번 앨범은 방황하는 김범수”라고 설명했다. 4번 트랙 ‘상남자’는 어떤 여성에게도 거침없이 다가가는 남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5번 트랙 ‘띠동갑’은 띠동갑과 이뤄지지 못했던 사랑 이야기를 그렸고, 8번 트랙 ‘카사노바’는 바람둥이지만 여자친구에게는 가식적으로 아닌 척 하는 모습을 담은 곡이다.
“대중들이 갖고 있는 김범수에 대한 이미지와 다른 콘셉트가 많아요. 하지만 이게 더 김범수다운 김범수일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한 분과 오랜 사랑을 했지만 이별 후에 방황을 겪기도 했고···. 20대 때 신앙생활과 일, 집, 한 여자만 바라보며 평이한 삶을 살았는데 거기서 벗어난 시기가 있었던 거죠. 그런 경험들이 이번 앨범의 중요한 뮤즈들이 됐어요. 그런 모습들을 여과 없이 표현했어요.”
자신있게 앨범을 만들었지만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대중에게 평가받는 다는 것은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이다. 김범수는 자신의 SNS를 통해 “1집부터 7집까지의 떨림을 합친 것 보다 8집 발표를 앞둔 지금이 더 떨린다”고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두려운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기존의 발라드 곡처럼 앨범을 냈어도 똑같이 두려웠을 겁니다. 대중 앞에 선다는 게 원래 그렇죠. 8집도 가수로서 밟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8집이 정점은 아닐테니까요. 다만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포인트’가 됐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판단을 겸허히 받아들일 거에요. 이왕이면 나의 변화와 시도를 신선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네요. 하하하하.”
“싸이는 싸이대로 소신을 갖고 음악을 했고 그걸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죠. 전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품고 재미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빌보드 차트에 오르기 위한 전략보다는 지금 하는 음악이 빌보드에 언제든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번 앨범을 작업할 때 음반시장에 대해서도 조사했지만 딱히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자신감이 중요하죠.”
그에게 자신감을 준 것은 지인들의 칭찬과 격려다. 김범수는 “예전에 함께 작업했던 가수 박선주와 작곡가 윤일상을 찾아갔다. 그 분들의 이야기가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그들의 평가가 내게 기를 불어넣었다”고 밝혔다.
“좋은 얘기는 못 들을 거라 생각하고 박선주와 윤일상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런 음악을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이제부터 네가 음악을 만들고 너의 이야기를 해라’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진짜 음악이고 가수로서 해야 할 일이다’ 등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큰 힘이 됐죠. 사실 앨범을 준비하며 적당히 발라드를 부르며 타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악몽이지 않았을까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김범수는 8집 ‘힘(HIM)’을 통해 자신을 노래하는 새로운 김범수로 태어났다. 앨범 제목처럼 ‘그에게’ 보내는 혹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잘 안다고 했던 것도 노래뿐이에요. 가장 오랜 시간 꾸준히 해낸 것도 노래뿐이에요. 몰입하거나 진득한 성격도 아닌데 노래할 땐 그게 가능해요. 노래할 때 뿌듯하고 나 자신이 완성되는 기분, 이 기분만큼은 변치 않도록 지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