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 좋아요. 아름다운 성유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양방언(54)은 만나자마자 걸그룹 핑클 이야기를 꺼냈다. 대뜸 핑클이라니. 귀를 의심했지만 ‘잘못 들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선율’을 ‘성율’로 발음했던 것. 조사 ‘이’가 붙으니 영락없이 핑클의 성유리가 됐다.
양방언의 발음이 다소 어눌한 이유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재일교포 1세다. 일본 태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 한국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1997년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 땅을 처음 밟고 ‘한국의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해녀의 노래’까지 작곡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 만든 곡이 ‘프린스 오브 제주(Prince of Jeju)’였습니다. 제주도를 표현하고 싶었지요. 그러다 제주MBC 측에서 야외공연을 제안했어요. 동시에 해녀박물관에서도 해녀를 위한 곡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왔답니다. 단순한 공연보다는 더욱 제주도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해녀의 노래’를 만들었지요. 제주 해녀 분들도 정말 고맙다고 했어요.”
양방언은 28~30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콘서트 ‘양방언 Evolution 2014’를 연다. 이 무대에 제주 해녀가 직접 해녀복을 입고 참여한다. 양방언은 “해녀 분들의 감사 표시”라며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공연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제주도는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문화재 등록을 위해 힘써왔다. 현재 남아 있는 제주 해녀는 4500여 명. 이르면 내년 유네스코에 등록될 예정이다. 여기에 양방언의 음악이 힘을 보태 더욱 의미가 크다. 양방언은 “사실 ‘해녀의 노래’ 선율은 일본의 행진곡에서 전해진 것”이라며 “이를 온전히 한국의 음악으로 다시 작곡했다. 제주도립교향악단과 협연도 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러한 작업들이 모두 집약된 축제가 지난 8월 개최된 ‘제주 판타지’다.
제주에서 시작한 그의 음악이 전 세계에 울릴 때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곡 ‘프론티어’는 2002부산아시안게임 공식음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어 박근혜 18대 대통령 취임식 음악,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음악 감독 등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12월 4일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 2주년 기념 연주회도 앞두고 있다.
“‘프론티어’는 아시안게임을 위해 만든 곡은 아닙니다. 원래 있던 곡을 아시안게임 측에서 사용한 것이지요. 이를 시작으로 큰 행사에 많이 참여하게 됐는데, 작품의 정체성은 ‘아리랑’에 있어요.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음악에는 정선, 밀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사용했어요. 소치 올림픽 때에도 이걸 다르게 구성해 선보였지요. 소프라노 조수미, 뮤지컬배우 나윤선, 가수 이승철 씨가 모여 세 장르를 아리랑에 담았어요.”
그는 자신이 작곡한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 판타지”라고 이름 지었다. 한국의 정서가 온전히 담긴 아리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 지금도 정선아리랑의 재창조를 위해 고심하고 있다. 양방언은 “12월 4일 정선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 2주년 기념 연주회가 있다”며 “전통음악가는 아니지만 ‘양방언이 했던 아리랑’으로 구체화시키고 싶다. 좋은 음악이나 영화를 접했을 때 바로 눈물이 나오듯 나의 아리랑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제주 해녀, 아리랑 등 유네스코와 인연이 깊은 양방언은 최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평화예술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그는 “유네스코 홍보대사로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고 보람이다”며 “좋은 음악으로 감동을 전해 모든 사람들이 화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이것이 음악과 예술의 가장 큰 힘”이라고 강조했다.
“1년간 의사로 근무하면서 음악에 대한 욕망을 참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있는 일 사이에서의 고민, 불안감과 자유의 공존이었지요. 결국 나는 자유가 이겼지만요. 허허. 하지만 불안감이 힘이 될 수도 있어요. 불안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지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젊을 땐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는 시각입니다.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상태를 알아야 하지요. 실력이 없는데 도전하는 것은 무모할 뿐이에요.”
그러면서도 그는 음악을 꿈꾸는 청춘들에게 “의과대학이라면 계속 다니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털어놓았다. ‘혹시 아들이 의사를 관두고 음악을 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한참을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이어서 왠지 모를 진심이 느껴졌다. 이에 더해 양방언은 “어떤 일을 하든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진로를 바꾼 그에게 달리는 힘을 준 사람은 ‘일본의 조용필’ 하마다 쇼고다. 지금도 함께 작업하는 절친한 동료다. 하지만 ‘의사를 관두고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무시당했다.
“식사자리에서 처음 하마다를 만났는데 ‘난 네가 싫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그러다 집에 한번 초대했는데 더러운 내 방을 보더니 ‘친해질 수 있겠다’고 말을 바꿨어요. 의사였다는 말만 듣고 부잣집 아들에 까다로운 사람일거라 생각했던 거지요. 그렇게 친해졌어요. 하마다는 1년에 100회 정도 투어를 다니는데, 그를 따라다니면서 음악을 많이 배웠습니다. 연주곡을 하나만 해도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진정한 아티스트가 뭘까’라고 생각하게 됐지요.”
두 사람은 현재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음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인연이다. 이런 인연들이 양방언의 다양한 음악세계에 자양분이 됐다. 그는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얻는다. 그렇게 음악이 자라난다”며 “음악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수많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양방언은 영화, 다큐멘터리, 게임,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성룡의 영화 ‘썬더볼트’,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OST를 제작했다. 내년 1월 개봉 예정인 일본영화 ‘어게인’ OST도 그의 손에 쥐여있다. 케이블채널에서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새벽의 연화’,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게임 ‘아이온’ 에 삽입된 곡들도 양방언의 실력이다.
그는 “다양한 작품의 음악을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배운다”며 “지금은 70대이신 임권택 감독님부터 게임을 좋아하는 청년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배울 점이 많다. 좋은 작품을 남기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얻을 수 있는지 항상 생각한다”고 작곡에 임하는 태도를 설명했다.
성장 환경, 음악 작업, 많은 동료, 국제무대 진출까지. 양방언의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혼합’이다. 이를 두고 그는 “장르의 혼합이 곧 판타지”라고 설명했다. 콘서트 제목을 ‘진화(Evolution)’라고 지은 이유다.
“내 삶 자체도 그렇지만 제주의 역사, 신화, 자연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도 ‘혼합’입니다. 아리랑에 각 장르를 담은 것도 그렇지요. 제가 추구하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담았을 때 하나의 큰 ‘판타지’가 완성되는 거지요. 그렇게 또 다시 제 음악도 한 단계 ‘진화’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판타지’는 ‘제주 판타지’ ‘아리랑 판타지’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울렸다. ‘양방언 Evolution 2014’ 콘서트에서는 어떻게 울림을 전할까. 양방언은 이번 콘서트에 대해 “음악을 들은 관객들이 감정적인 폭발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서를 느끼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폭발”이라고 말을 맺었다.
/사진 유용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