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정영 인턴 기자] 록밴드 베이시스트에서 재즈 보컬로의 변신. 획기적이라면 획기적이다. 모던 록밴드 ‘보드카레인’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 2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던 주윤하가 한국 최고의 재즈뮤지션들과 손을 잡고 ‘재즈 페인터스(jazz painters)’를 최근 발매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이 감미로운 음색을 그동안 어디에 숨겨놓았었나 의문이 들 정도다.
“베이시스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보통의 악기 전공자들이 그렇듯 저도 연주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처음 100장 정도 모은 CD가 거의 재즈 음악일 정도였으니까요.(웃음). 락 밴드를 할 때에도 재즈 음악은 계속 들어왔던 터라, 생경한 음악은 아니었어요. 언젠가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죠.”
유년시절 가장 먼저 접했던 재즈 음악이 결과적으로 그를 재즈뮤지션으로서 발돋음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떤 면에서는 재즈가 굉장히 편했어요. 팝이나 모던 록은 더빙하는 작업이 많아서 연습실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요. 재즈는 직관적이고 즉흥적이죠. 당연히 어려움은 많지만,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서인지 정서적으로 마음이 편안했어요.”
인터뷰 전 날, 뮤직비디오를 찍고 왔다는 그. 어찌 보면 앨범 발매 후 10일이나 늦게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게 요즘 가요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다.
“요즘은 앨범이 발매된 직후 거창하게 홍보하고, 앨범의 흥망을 쉽게 결정짓더라고요. 단기간 내 승부를 보지 못하면 금방 활동을 쉬는 것 보다,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방’이 아닌 ‘차근차근’ 음악을 하는거죠. 한 라디오 방송에서 2012년 앨범을 들려줬더니 DJ 장기하가 ‘왜 굳이 이 음악을 추천하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아직 홍보중’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다 웃으시더라구요. 대부분의 분들이 저를 모른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저를 알려간다는 의미로 희망을 갖고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장기전’이니까요.”
생각도 포부도 여느 젊은 가수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랜 기간의 밴드 활동, 솔로 전향, 다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까지, 그에게도 수많은 고뇌의 시간이 있었으리라. 3단 변신을 거듭할 동안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팬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이번 제 앨범에 보드카레인 곡 중 잘 알려진 ‘백퍼센트’라는 곡이 담겼어요. 사실 걱정을 좀 했죠. 원곡 스타일을 남겨두고 싶어하시는 팬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썩 거부감이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서 나타난 것만으로도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웃음). 다만 보컬로 팬들을 만나니까, 제가 더 어색하더라구요. 9월 공연에서 처음으로 재즈 앨범 수록곡 중 3 곡을 들려드렸어요. 악기를 거의 연주하지 않고, 정말 프로페셔널 가수처럼 노래를 해야하니까 너무 떨렸어요. 팬 분들에게 다음 공연에서는 시치미 뚝 떼고 자연스러운 보컬로 나타나겠다, 11월 공연에는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자고 했죠(웃음).”
인디신과 재즈신, 사실 두 개의 음악 시장이 대중들에게 익숙한 문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주윤하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개척해나가고 있다. 소위 ‘아이돌’ 음악에만 집중돼 있는 대중의 시선이 아쉽지는 않을까.
“인디신을 소비하고 즐기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척박한 환경은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 물론 ‘왜 사람들은 최신음악 차트 상위권에 오른 음악만 들을까’하는 치기어른 마음이 들었을 때도 있었죠. 그런데 한 때 카페를 운영하면서 1년 동안 음악하지 않는 사람들과만 지낸 적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그들 삶이 너무 고단해서 무언가를 찾아듣는다는 게 쉽지 않은 거에요. 근데 거기다 대고 ‘좋은 음악이 많은데 왜 인디신을 찾아 듣지 않느냐’고 하면 되나요? 저희가 찾아가야죠. 다행히 이제는 인디신 범주가 넓어져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유입됐어요. 플랫폼이 커지고 있으니, 묻혀있던 아티스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싱어송 라이터. 노래를 부르면서 작사나 작곡도 겸하여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멜로디만큼이나 중요한 노랫말을 위해 주윤하는 수도권(?) 밖으로 훌쩍 떠난다고 한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아닌, 꿈과의 이별, 사람 사이의 이별을 의인화 시켜서 가사를 쓰는 편이에요. 제 가사가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죠. 속뜻을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도 괜찮은 것 같아요. 스팅이라는 가수가 ‘집 앞 해변가에 가서 작고 예쁜 조약돌을 주워오듯 가사를 주워온다’고 하더라구요. 그 사람 저택이 7~8개 있다던데요(웃음). 그런 말이 이제 이해가 되더라구요. 어떤 단어, 문장이 산책하다가 또는 여행하다 문득 떠오르면 글을 쓰고 작업실에서 섬세하게 정리를 해요. ‘음악’은 이야기니까. 가사 속에 ‘이야기’를 많이 담으려 애쓰는 것 같아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냐만은,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무엇일까.
“‘밤의 노래’ 가사가 가장 눈에 들어와요. 어두운 밤에 그림자를 만났을 때, 우울한 자기를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에요. 자기가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은밀하게 혼자 있는 시간에 만나게 되잖아요. 그런 것을 차가운 밤에 어두운 달빛 아래에서 만났다고 생각해봤어요.”
주윤하의 가사는 이별 이야기라도 ‘절절’보다는 ‘담담’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울부짖지 않는 아픔이 더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랄까. 그가 존경하는 음악가와 그의 음색은 많이 닮아있다.
“‘쳇베이커’(재즈 음악가‧트럼펫 연주가)를 좋아해요. 인간성은 말도 되지 않은데, 음악은 정말 좋아요. ‘악마가 부르는 천사’의 노래라고 일컬어져요. 좋은 음악이 뭐냐고 물었을 때, 사람에게 어떤 기분을 들게 할 수 있느냐, 그게 정말 좋은 음악인 것 같아요.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듣노라면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내리게 하고, 아예 다른 공간으로 저를 데리고 가는 느낌이에요.”
이번 앨범에는 그간 그가 무대에서 불렀던 재즈 넘버들과 새롭게 작곡된 오리지널 곡들이 빼곡히 채워졌다. 현재 가장 활발히 메인스트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즈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간 한국 재즈신에서의 아쉬움으로 남았던 오리지널 한글 가사에 신경을 썼다 한다.
“이번 앨범 작업할 때, 쉽게 접근하려 노력했어요. 재즈라는 것이 아무래도 생소한 분들이 많으실 거에요. 듣는 이 중심의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 위주의 음악이라서 대중 음악 중에서도 비주류로 통하죠. 재즈 가사가 우리말로 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서 가사 부분을 많이 신경 썼던 것 같아요.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과시용이 아닌 음악만을 위한 음악으로 접근할 건 아닌 것 같아요. 결국 ‘우리들의 시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재즈를 너무 겁내지 말아 하셨으면 좋겠어요.”
재즈로 대중과의 소통을 꿈꾸는 주윤하의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앞서 말했지만, 길게 가고 싶어요. 주윤하의 ‘재즈페인터스’로 정말 많은 활동을 할 거예요.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재즈를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많은 무대를 서고 싶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노래를 부르
‘노래하는 사람’을 자칭하는 주윤하의 모습에 저절로 흐뭇함이 몰려왔다. 오래도록 잔잔하게 대중의 곁에서 ‘동행자’같은 그만의 이야기가 속삭여지길 바라본다.
한편 주윤하는 오는 11월 14일 강남구 삼성동 올림푸스 홀에서 ‘재즈 페인터스’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