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공동취재단 |
황씨에게 신해철은 학창시절 그 자체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황씨는 "시퍼런 젊은 날의 반쪽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각박한 삶 속에 그의 음악을 잊고 살았다. 그래서 황씨는 더 눈물이 난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닥친 뒤 '추억'이 되버린 그에게 미안했다.
29일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신해철의 빈소에는 끊임 없는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조용필, 배철수, 서태지, 한대수, 김창환, 이승철, 김장훈, 윤도현 등 가수들부터 안도현 공지영 조국 등 대중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발걸음을 옮겨 그를 추모했다.
고인이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기라성 같은 동료 뮤지션·문화계 인사들의 애도 보다, 음악 팬들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해철 측은 지난 28일 오후 1시부터 일반 조문객을 받았는데 약 3200명이 빈소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약 1분씩 5명이 짝을 지어 조문했다. 그러다가 오후 6시께 퇴근시간이 됐을 무렵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10명씩 한꺼번에 고인을 마주했다. 이병하(38·길음동) 씨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작별인사를 하지 않으면 한(恨)이 될 것 같아 왔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신해철 측은 "유가족의 건강을 고려해 일반 팬들의 조문 시간을 오후 9시까지로 제한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몇몇 보도가 나왔으나 이를 알지 못한 팬들은 오후 10시가 넘어서도 계속 빈소를 방문했다.
부산 대구 광주 등 지방에서 찾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고스란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 한 명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내미는 건 부의금이 담긴 흰 봉투뿐이었다. "이름 석 자라도 남기시라"는 소속사 관계자의 말에도 손사래만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40대 안팎의 중년이 눈물을 보이기 쑥스러웠을 테다. 장례식장 외부 한 귀퉁이 벤치에는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소주잔을 기울이며 훌쩍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에서는 신해철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독 추운 밤이었다.
30~40대에게 고 신해철은 가수를 넘어선 시대를 대변한 아티스트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이 시대 청춘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각종 정책과 특정 산업의 구조적 문제점 등 논란의 중심에도 곧잘 섰던 그는 소신을 당당히, 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밝히는 몇 안 되는 논객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신해철은 한 세대의 감성과 의식을 이끌었다"며 "한 마디로 그의 죽음은 개인이 아닌, 우리 시대 상실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신해철은 지난 27일 오후 8시 19분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숨졌다. 발인은 31일 오전 9시. 장례는 5일장 천주교식으로 치러진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될 고인의 유해가 안치될 곳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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