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태지(사진=강영국 기자) |
20일 발표된 가수 서태지의 정규 9집 수록곡 '나인티스 아이콘(90s Icon)'의 일부 노랫말이다. 그의 고백이 아련하다. 이날 오후 4시 현재 먼저 공개됐던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 외 다른 신곡은 멜론 실시간 차트 50위권 내 단 한 곡도 없다.
그러나 서태지를 '1990년대 아이콘'으로만 정의하는 건 야박하다. 음원 차트 순위가 전부는 아니다. 서태지는 누가 뭐래도 서태지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서태지는 '음악적 도전과 실험', '시대를 향한 깨어 있는 의식' 두 가지 키워드로 대변된다. 우리 사회에서 서태지에 대한 논의와 평가가 음악뿐 아니라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층 친(親) 대중적인 음악과 소통에 나선 서태지다.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서태지는 가감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꽤 공격적인 취재진의 질문에도 여유가 넘쳤고, 자신을 낮췄다. 단, 서태지를 둘러싼 이야기 중 '이지아'만 빠졌다. 취재진이 굳이 물어볼 이유도, 그가 답할 의무도 없었다.
다음은 서태지와의 일문일답이다.
↑ 서태지(사진=강영국 기자) |
▲ 특별히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토크쇼'에 종종 출연했는데 이번에 유재석 씨와 했을 뿐이다. 9집이 대중적인 음악인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보니 활동도 그렇게 됐다.
- '변절자' 소리가 나올 정도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변한 건가
▲ '변절자'라는 이야기는 그룹 시나위를 나올 때부터 들어왔다. 내 성격이 그렇다. 변화를 좋아한다. 확실히 가족과 함께 하면서 여유가 생기고 행복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런 점이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들지 않을 수 없다. 딸아이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번 앨범을 작업했다. 사실 그것이 현재 내가 잘 할 수 있는 음악이다. 앞으로도 대중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 신드롬까지는 아니어도 요즘 어린 친구들도 '아 서태지는 이런 음악하는 사람이구나' 알았으면 좋겠다.
- 대중적 음반을 내놓고도 오히려 마니아 팬만이 함께 하는 분위기다. 인기가 반감된 걸 느끼나
▲ 그건 잘 모르겠다. 대중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콘서트 관객이나 음원 순위들도 말씀하시는데 오히려 8집보다 잘 됐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아직 많은 분이 공연장을 찾아주신데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앨범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토론이 이뤄지는 현실이 좋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더 좋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 공교롭게 양현석이 이끄는 YG 소속 악동뮤지션 에픽하이와 음원 발표일이 겹쳤다
▲ 양군(양현석)이 성공한 부분에 대해서는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다. 예전에 함께 했던 동료들이 다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씀대로 '공교롭게'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만, 하루에도 여러 가수들의 음원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 '나인티스 아이콘'에서 '한물간 별볼일 없는 가수'라고 자신을 칭했는데
▲ 내 진심이다. 음반이 나올 때마다 좌절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번 음반 만들 때도 그랬다. 7집 때도 '제로' '로봇' 등 고해성사 같은 곡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내가 1990년대처럼 음악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결국 그 과정을 거쳐 마음에 드는 곡들을 엄선해 앨범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 팬들도 나이가 들어가고, 주류가 등장하면 우리가 밀려나는 느낌은 다들 갖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은 받아들이고자 한다. 대신 더 소중한 추억은 우리에게 남아있다. 희망·용기, 이런 것들을 팬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었다.
- 음원차트 순위 저조하다
▲ 성적은 저조하다. 8집 때도 '광탈'(광속 탈락)했다. 이번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아이유 덕분에 '소격동'이 롱런했다. 덕분에 10대들도 이만큼 듣는 것 같다. 성적을 따지는 것은 학교 다닐 때부터 싫어했다. 그래서 중퇴했다.(웃음) 성적이 아닌 음악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됐으면 좋겠다.
- '대중음악계의 문익점'이라는 평가가 있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나
▲ '수입업자'라는 얘기 알고 있다.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의도한 부분도 있다. 1990년대에는 한국의 음악 장르가 다양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이런 장르가 한국에도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문익점'을 자처했다. 7집 때까지 그랬다. 8집부터는 영향을 받은 팀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내 안에서 해결하도록 노력했다. 이번 음반도 마찬가지다. 예년에는 영향을 받은 팀도 많았고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엔 없다. 일렉트로닉은 1집 때부터 계속 시도했고, 테크노믹스를 강조한 곡도 많았다. 일렉트로닉은 나에게 뗄 수 없는 장르이기도 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장르다. 물론 기본은 시나위 때 했던 록이다.
- '음악 수입'을 넘어 '표절' 논란이 있다
▲ 표절 논란은 참 오래됐다. 실제로 레퍼런스를 쓴 적도 있다. 지금까지 '표절이냐 아니냐' 이야기가 많은데, 일단 표절은 아니다. 예전에는 방송에서 "장르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OOO 수 있다" 식의 해명도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불필요한 것 같다. 다 설명 드리려면 하루 종일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런 논란이 사라지길 바란다. 음악 들어주시고, 각자 판단해주시길 바란다.
-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 '소격동'은 내가 살았던 예쁜 마을이다. 겨울이 오면 운치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삼청공원을 매일 다녔다. 그곳을 가봤는데 시냇물이 다 말랐더라. 그때 충격을 받아서 이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1980년대는 어두운 시절이었지 않나. 실제로 집 근처에 보안사가 있었고, 아름다웠지만 살벌한 동네였다. 시대상을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느꼈던 공포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함께 담았다. 사회적 비판을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이야기 많이 나오는 노래였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크리스말로윈'은 캐롤에서 시작된 곡이다.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준다'는 노래가 있지 않나. 어렸을 때부터 난 그 노래가 무서웠다. 지금 부모가 돼서도 고민이 많다. 울지 말라고 달래는 것인지 내가 가진 권력을 이용해 억압하는 것은 아닌지.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하는데, 어른들이 '공포'를 이용해 울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 무서웠다. 다양한 해석 바란다.
- 동화치고는 내용이 잔혹하다
= (웃음) 예쁜 동화는 아니다. 어느 정도 스토리텔링이 연결돼 있다. 소격동에서의 내 어린 시절 이야기, 지금 아버지가 되서 느끼는 감정을 들려주고 싶었다. '크리스말로윈'은 적나라하게 세상에 대해 얘기했다. '나이티스 아이콘'은 지금 내 그대로의 이야기다. 앨범 재킷의 소녀는 내 딸이다. '크리스말로윈'은 딸이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곡이어서 배에 대고 들려주던 곡이다. 이번 앨범의 뮤즈는 '내 딸'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굉장히 강렬한 영감을 줬다.
- '문화 대통령' 수식어 어떻게 생각하나
▲ 지금의 수식어가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대통령이 존경하는 문화 대통령'"이라는 말을 해주신 이후 그렇게 불린 걸로 알고 있다. 과분하고 족쇄같은, 양면성이 있는 수식어다. 어떻게 하다보니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독재자 같은 느낌이다. 누군가 빨리 가져갔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다.
- 앞으로 더욱 자주 앨범을 낼 것인가
▲ 사실 나는 '신비주의'의 정의를 모르겠다. 그냥 음악을 만들고 발표하고 공연하는 일련의 활동만으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능을 안하니까 신비주의로 불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 부분은 나도 아쉽다. 마음 같아선 매년 앨범을 내고 싶지만 잘 되지 않을 뿐이다. 음악만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 아이유와의 콜라보레이션
▲ 사실 난 가수라기 보다,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다보니 노래까지 하게 됐다. 소격동은 예쁜 노래인데, 남자보다 여자가 불렀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이유가 떠올랐다. 아이유 씨 덕을 정말 많이 봤다. 업고 다니고 싶다. 아이유를 딱 떠올린 계기는 그의 데뷔곡부터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색은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그런 감성과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기적이다. 그 기적이 '소격동'에서도 이뤄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내인 이은성이 나보다 더 팬이다.
- 아내 이은성의 콘서트 평가는
▲ 몇가지 지적은 했다. '공연 잘 된 것 같느냐'고 물어보니 "100점 만점에 80점"이라더라.
- 이제 후배가수들 프로듀싱은 하지 않나
▲ 넬과 피아는 아주 훌륭한 친구들인데 과거 알려줄 수 있는 홍보 창구가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내가 레이블을 만들고 그들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 이후로 눈에 띄는 친구들이 없다. 지금도 열려 있다. 언제라도 내 마음을 울릴 수 있는 후배가 나타나면 가능하다.
- 과거 서태지와 지금의 서태지를 비교한다면
▲ 서태지의 시대는 1990년대에 끝났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2000년대에 컴백은 했지만 마니아적인 음악이었기 때문에 대중을 버린 셈이다. 팬들에게 미안한 점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걸 거부할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음악을 통해 교류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있는데
▲ 내가 음반을 내면 '팬과 안티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들 한다.(웃음) 재미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게 민주주의다. 악플? 오래됐다. 과거에는 안티가 없었지만 언론과 그랬다. 팬들은 2000년대부터 안티가 생겼다.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는데 그게 날 이슈의 중심으로 이끌고 있다. 더군다나 8집과 9집 사이에는 내가 그들에게 '떡밥'을 던지지 않았나. 아주 진수성찬을 차렸다. 하지만 가십은 잊혀질 것이다. 그렇게라도 음악을 한 번 더 들어주신다면 감사한 일이다. 음악에 대한 토론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fact@mk.co.kr / 사진=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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