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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 ‘화장’을 공개한 임권택 감독의 말은 울컥하게 했다. 5일 기자시사회 후 부산 해운대의 한 술집에서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다. 많은 걸 내포한 거장의 한 마디.
'씨받이’(1987)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서편제’로 상하이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취화선’(2002)으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었던 그지만 어느 순간부터 흥행과는 멀어졌다. 대중과 멀어졌다는 말과도 같다. 감독의 101번째 작품인 ‘달빛 길어올리기’는 흥행에 실패했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제작 중단위기도 겪었다. 사실 102번째 연출의 기회가 있는지조차 물음표였다.
함께하자는 이가 거의 없었다. 왕년의 임 감독이 아니라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그때 나선 건 명필름이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오랜 영화계 선배와 호흡을 맞추고 싶어 프로듀서를 자청했다.
‘건축학개론’, ‘마당을 나온 암탉’,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을 흥행시킨 심 대표는 다른 작업으로도 아주 바쁘다. 다른 감독들이 함께하자고 덤비는(?) 제작사 중 한 곳이다. 심 대표는 김훈 작가의 ‘화장’ 영화화를 생각했을 때 임 감독을 떠올렸다. 존경심을 표하고 모셔 왔다. 기자회견에서 "칸 출품 시기를 맞춰야 해 졸속으로 출품할 수밖에 없었다”는 임 감독의 언급에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선배가 영화를 보고 해맑게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심 대표 역시 좋아했다.
김호정의 열정도 ‘화장’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날 공식 기자회견에서 모더레이터를 맡은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모두가 알고 있는 것으로 알고 그의 투병을 이야기했고, 얼떨결에 김호정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그의 투병기 탓 이날 오후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것처럼, 그의 눈물 고백은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사실 김호정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아무에게도 자신이 병에 걸렸던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안성기는 여후배가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해 안부를 물었는데 “‘여의치 않아 여행 좀 다니다 쉬다 왔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심재명 대표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선배의 고백에 같이 눈물 흘렸던 김규리도 "처음 들었던 말”이라며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호정은 촬영 현장에서 식단 조절 등을 하며 혼자 관리를 꾸준히 했단다.
김호정은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라 하고 싶다고 했다. 책을 폈는데 투병하다가 죽는 역할이라서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했다”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누군가는 할 것이고, 배우의 운명이라는 게 이건가?’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러곤 담담하게 촬영을 했다. 힘든 촬영도 소화했다.
극 중 뇌종양을 앓다가 쓰러지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한 인물인 아내는 용변을 처리하지 못해 남편에게 도움을 받고, 자신의 몸을 씻겨주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다. 이 장면에서 음부 일부가 드러나기까지 한다. 후반부 이 신은 처절하고 애잔하며, 슬프다. 이 장면은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신으로 구현됐다.
특히 기억하기 싫었을 수도 있는, 죽음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음에도 김호정은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하긴 그는 지난 2001년 문승욱 감독의 ‘나비’에 출연해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인 청동표범상을 받은 적 있는 연기파다.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임 감독도 “오랜만에 기쁘고 행복하다. 젊은 사람들의 기운을 받는 것 같다”고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화장’은 부산영화제에서 만나거나, 내년 2월 초쯤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다.
jeigun@mk.co.kr/사진 유용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