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그때 그 가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인터뷰를 한 것도 벌써 17번째다. 그간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하던 가수들을 찾아 나선 것이 대부분이다. 이유는 필자가 그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때만큼 가요계가 풍성하던 시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 대상을 찾다 보면 “아, 이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른 가수였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이 그랬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노래를 듣고 바로 인터뷰를 결정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가수 차진영이다. 1996년 데뷔곡 ‘애니아’를 불렀다. 사실 이 노래가 지극히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예능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방송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그의 노래가 기억되는 이유는 단번에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 때문.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차진영 특유의 목소리가 뭇 대중들의 시선을 끌었다. 지난해 Mnet ‘슈퍼스타K5’에 출연한 밴드 미스터 파파의 ‘파파 돈 크라이’(Papa Don’t Cry)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그 보컬색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갑자기 미스터 파파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밴드의 보컬이 바로 차진영이다.
◇ 사촌형 최수종 따라 상경해 가수로 데뷔까지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차진영은 가수라는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다. 차진영은 사촌형인 배우 최수종과 함께 살면서 그의 매니저를 자청한다. 그렇게 연예계에 조금씩 다가가던 중 그에게 기회가 왔다.
“수종이 형의 매니저 비슷하게 운전하고, 극장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연히 신문을 봤어요.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신문에 엔터테인먼트 오디션 광고가 실렸거든요. 혼자 압구정동에 찾아갔는데 생전 처음 경험한 녹음실이 정말 으리으리하더라고요.”
오디션을 통해 수많은 이들 중 총 4명이 연습생으로 발탁됐다. 그 중 한 명이 차진영이다. 그는 연습생 신분으로 20만원, 지금으로 치면 약 80~90만 원가량의 지원금을 받고 생계를 유지하며 가수의 꿈에 한 발 더 다가갔다. 하지만 앨범 한 장 내지 못하고 연습생 시절을 끝내야 했다.
“군대에 갈 나이가 돼서 결국 연습생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어요. 노래가 좋아서 당시에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었는데 군대를 가야 하니 해군홍보단으로 지원했어요. 운 좋게 합격했죠. 신참 때는 꿈도 못 꿨지만, 고참이 되고 나서는 하루에 7시간씩 노래 연습을 했어요. 내 생애 그렇게 노래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군에 있는 기간 동안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갔다. 감정을 끌어 올려 목소리에 녹여내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의 말로 당초 미성을 자랑한 그였지만, 군에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끝에 지금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결국 지금의 차진영은 군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거의 3년의 기간 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했고,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었죠. 정확히는 32개월인데 전역해서 바로 수종이 형을 따라다니면서 알게 됐던 매니저를 통해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가수들의 기획사인 서인기획과 계약을 하게 됐죠. 거기서 나온 게 데뷔곡 ‘애니아’였어요.”
◇ “저만 보면 돈이 도망가요. 인연이 아닌가 봐요”
서인기획에서 2집까지 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앞서 인터뷰했던 가수 노아 역시 서인기획 출신으로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시 노아는 데뷔 앨범을 내고 소속사 관계자들이 잠적하고, 다시 의기투합해 만든 2집 앨범 이후 또 한 번 버림받았다고 말했다.
“계약 연장을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죠. 그런데 계약금도 주지 않고 일은 일대로 시키니까 정이 뚝 떨어졌죠. 심지어 프로듀서로도 일을 했는데 그에 대한 돈도 전혀 받은 적 없었어요.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던 거예요.”
결국 그는 계약 해지를 요청하고 뉴욕 멘하튼 센터 스튜디오와 계약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편하지 못했다. 해외와 국내를 잇는 한국 매니저가 중간에서 돈을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해외 기획사와 아티스트 간에 이간질을 해 계약해지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던 차진영은 가수 박상민의 누나가 하는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나마 이 시기가 마음에 여유가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일한 이후 그의 인생은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집이 한 푼도 남지 않고 타인의 손에 들어가거나, 2006년 처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꼈지만 500만원이 넘는 돈을 받지 학원이 문을 닫는가 하면, 법정싸움까지 번지기도 했다.
“내 이름을 걸고 라이브 카페도 해보고 SBS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가 하기만 하면 문을 닫고, 사기를 당하고…. 아무래도 제가 돈이랑 인연이 없는 것 같아요. 다가서려고 노력하면 도망가더라고요(웃음).”
◇ 얼떨결에 나간 ‘슈스케5’를 통해 얻은 것들
한참 오르락내리락, 삶의 굴곡을 느끼고 있을 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바로 ‘슈스케5’ 출연 제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그에게 그 제안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몇 차례의 권고 끝에 결국 그는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 나가려고 했는데 계속되는 제의를 피할 수 없었죠. 하지만 그렇게 나간 방송은 저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어요. 제가 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간 줄 아세요? 알아보지 말라고요(웃음).”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당시 그의 심경을 듣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보는 그의 모습과 달리 2차 예선 때부터 심장이 뛰고 노래가 안됐다고. 사실 잠을 안자는 것은 대다수의 뮤지션들에게는 익숙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차진영은 이 같은 이유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을 들었다.
“평소에 저도 잠을 많이 안자고, 특히 새벽에 작업하는 일이 많잖아요. 밤샘 작업은 사실 일도 아니에요. 근데 왜 그랬냐고요? 입맛에 맞지 않는 음악을 하려는 것도 있고, 타인에 의에 강제적으로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더라고요.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더해진 거죠.”
결국 그녀는 TOP10을 앞둔 무대에서 스트레스가 절정에 치달았고, 가사 한 글자도 기억을 하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탈락의 고배를 마신 차진영은 함께 했던 멤버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더욱 힘들어 했었다. 더욱이 올해 초,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냈고 방송을 통해 얻은 인기를 혼자 독식하려는 이미지로 비춰질까 걱정했다.
“사실 ‘슈스케5’를 통해 얻은 건 병이에요. 심적인 병이요. 그때 이후로는 가사를 한 줄도 못 외웠어요. 트라우마가 생긴 거죠. 그걸 치유하려고 정신 병원도 찾았고 종교의 힘을 빌려보기도 했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당시엔 그것조차 힘에 부쳤어요. 앨범을 낸 것도 몇 년 전부터 준비하던 건데 괜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맹세하건데 절대 미스터 파파 때문은 아닌데 말이죠.”
그가 ‘슈스케5’를 통해 얻은 건 또 하나 있었다. 욕심을 버리고 돈을 쫓지 말자는 것.
“이제 금전적인 욕심이 없어요. 욕심을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 트위터 @mk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