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중견’이라는 호칭이 제법 어울릴 법 하다. 가수 박혜경. 1997년 더더 1집 ‘내게 다시’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였으니 어느덧 데뷔 18년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선 언제 봐도 풋풋한 코스모스의 향이 난다. 십수 년 전 발표했던 히트곡을 리메이크해 들고 나왔음에도 그녀의 ‘고백’은 여전히 풋내 가득하니 말이다.
최근 홍대 한 카페에서 만난 박혜경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가녀린 몸매를 자랑했다. ‘고백’ 활동을 위해 식단 조절과 운동으로 3kg 감량했다는 그녀다. 하지만 이래봬도 “건강진단을 받으니 신체나이 30살로 나왔다”며 여유 있게 웃었다.
‘고백’은 1999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5년 전 곡이다. 한 번이라도 리메이크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었죠. 그 땐 그냥 노래만 불렀어요. 지난 달 ‘랄랄라 세상’을 내놓을 때까지도 ‘고백’ 리메이크 계획은 없었어요. 그러다 너무 기타를 잘 치는 천재소녀가 제 인생에 등장해 한 번 해봐야겠다 생각하게 됐죠.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지 자꾸 미래를 생각하게 되네요. 그 땐 현재만 생각하고 노래 불러 좋았는데 참...(웃음)”
박혜경이 찜한 파트너는 유투브 누적 조회수 800만을 기록하고 있는 핑거 기타 천재소녀 산드라 배다. “산드라 배가 우리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어요. 우연히 만나게 돼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해봤는데, 이렇게 곡이 완성됐네요.”
그렇게 탄생한 ‘고백’ 어쿠스틱 버전에서 박혜경은 기존과 또 다른 감성을 선보인다. 성대결절 및 폴립 제거 수술을 받은 후 미세하게 달라진 목소리도 한 몫 한다. “수술 후 좀 더 허스키하면서 탁성이 생겼어요. 이번엔 모든 악기가 다 빠지고 오직 기타 반주에 내 목소리 하나니까 잘 어울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연습 삼아 불러봤는데, 그 느낌이 좋다고 그대로 음원으로 내놓게 됐어요.”
수술 그 후. 어느새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심적으로도 완벽하게 적응된 것 같진 않다”는 그녀다. “때론 불안하고, 걱정도 되죠.” 성대 이상은 어쩌면 가수로서 치명적인 선고이기도 하다.
“제 2의 시작이랄까요. 새로운 박혜경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수술 후 처음으로 ‘정말 우리가 사랑했을까’라는 곡을 발표했었는데 그 때도 ‘역시 목소리 좋다’는 댓글이 100개 중 99개였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좋다고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평소 “과거를 많이 생각하는 편이 아니다”라는 박혜경이지만, ‘고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사랑받는 가수의 진솔함이 묻어났다.
“계산하지 않았지만 행운이 따르는 게 ‘고백’이었다 생각해요.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저에게는 우연히 다가온 일이 굉장히 많았어요. ‘고백’ 작곡가도 엄마 식당에서 우연히 알게 됐고, 무턱대고 곡을 달라고 졸라 받은 곡이 ‘고백’이었죠.”
그녀에게 다가온 행운의 여신이 어디 ‘고백’뿐인가. ‘너에게 주고 싶은 세가지’, ‘빨간 운동화’, ‘레인’, ‘안녕’, ‘동화’, ‘레몬트리’ 등 발표하는 곡마다 화제가 되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룹 더더 시절 부른 ‘주문을 걸어’를 비롯한 다수의 히트곡이 CF에 삽입되며 인기에 시너지를 냈다. 한 때 ‘얼굴 없는 가수’였던 그녀는 순식간에 ‘전국구 가수’로 떠올랐다.
“행운이 많이 따랐어요. TV 활동이 없었을 때도, 갑자기 제 음악이 TV에 나올 줄 알았겠어요? 광고에서 이렇게 사랑받을 줄 몰랐죠.”
꾸준히 따라오는 행운에 취하거나 갇히는 마음이 생기진 않았느냐 묻자 박혜경은 “제작자 분들은 그랬을 지 몰라도 저는 그렇지 않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그녀지만, 철저히 음원차트 위주로 돌아가는 요즘 음악 환경이 못내 아쉽다는 속내도 숨기지 않았다. “평소 차트를 자주 들여다보진 않는데, 개인적으로 실시간 차트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루 혹은 몇 시간의 실시간 차트 순위에 울고 웃는 현실이 좀 씁쓸하네요.”
그 와중에도 고마운 일은 박혜경표 음악은 여전히 청량하고 젊다는 것. 신기하게도 그녀의 음악에는 피터팬의 친구, 팅커벨처럼 늙지 않는(?) DNA가 숨겨진 듯 하다. 덕분에 “팬층의 연령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박혜경이다.
“가수가 나이를 먹었으니 원래는 제 팬들이 40대여야 맞는데, 신기하게도 20~30대가 많아요. 데뷔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죠. 음악 스타일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최근 오랜만에 출연한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계속 음악을 하다 보면 때로는 (노래한다는 게) 가볍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진 순간이었어요. 예전을 생각하면 이 무대 자체가 꿈이었는데 말이죠. 너무 오랫동안 노래를 하니 무뎌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다는 게 참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고백’으로 시작된 소소한 이야기는 앞서 발표한 신곡 ‘랄랄라 세상’까지 이어졌다. ‘랄랄라 세상’은 힘든 세상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쓴 가사가 인상적인, 누가 들어도 쉽게 공감 할 수 있는 내용의 곡이다. 기존 달콤한 사랑노래가 익숙했던 박혜경의 팬들에겐 생소한 주제이기도 하다.
“박혜경이 ‘여자 김광석’도 아니고. 사실 제가 부른다 했을 때 어색할 수 있는 노래예요. 저 역시 처음 노래를 접했을 땐 낯설었죠. 하지만 ‘꿈 따위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와닿았어요.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기 계발서에선 꿈을 좇으라 하는데, 현실은 다르죠. 성공하려면, 돈을 벌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죠. 어느 누구도 ‘지금도 잘 하고 있어’라고 위로하지 않죠. 그런 면에서 노래가 참 와닿았어요.”
최근 몇 년간 소송에 휘말린 탓에 겪은 이 사회의 쓴 맛 속에서도 2년 가량 된 전원생활에 대한 예찬도 빼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비결이 바로 이것, ‘낭만’이 아닌가 싶다.
“저는 낭만 빼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에요. 낭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죠. 좋으면 그 기분이 감춰지지 않고, 아직도 20대 차림으로 다니고.(웃음) 단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낭만에 의한, 낭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고, 살고 싶어요.”
그런 그녀가 꿈꾸는 낭만은 무엇일까. 잠시 눈을 감고 즐거운 상상에 빠진 박혜경이 입을 열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그동안 취미 삼아 했던 모든 것들을 하고 싶어요. 공방에 다니고 있으니까 가구도 만들고 그릇도 만들 수 있고, 자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고 요리도 하고. 자연과 함께 하는 그런 문화 공간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때도 음악을 한다면,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내가 만든 것을 공유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렇게 살면 참 행복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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