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이름 없었던 신인감독이 만들었다면 괜찮은 연출자 나왔다고 했을 것 같아요. 아마 영화를 보고 '감독이 누구냐?'고 찾아보고 다른 방향의 이야기들이 나왔겠죠. '뭐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한 장면 한 장면 정성 들여 찍었지?'라고요."
세월호 참사로 영화계 공식 행사가 중단됐기 때문에 '역린' 출연진은 개봉 이틀 전에야 영화를 봤다. 혹평이 쏟아지고 난 뒤 관람한 것. "혹평을 받은 것보다는 괜찮은 영화가 나온 것 같다"는 정재영은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랬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실제를 바탕으로 해서만 영화를 만든다면 '영원한 제국' 이상으로는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요. 거기에 드라마를 넣으려면 새로운 인물과 사연이 필요하죠. 팩트에 갇힌 사람은 더는 뭔가를 만들어 낼 수가 없잖아요. 허구에 있는 인물로 스릴러적인 내용이 더해진 것으로 생각하면 '역린'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역린'은 정조 즉위 1년,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들의 엇갈린 운명과 역사 속에 감춰졌던 숨 막히는 24시간을 그렸다. 1777년 7월 28일 왕의 서고이자 침전인 존현각에 자객이 숨어든 '정유역변'이 모티프다. 현빈이 정조, 정재영이 정조의 충신 내관 상책을 맡았다.
극 중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궐에서 함께 자라 왕과 신하의 관계를 떠나 애틋한 남남 관계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재규 감독은 상책 역을 캐스팅할 때 형처럼 보일 수 있는 진심이 느껴지는 배우로 정재영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했다고 한다. 과거 '플랜맨' 홍보 인터뷰에서 현빈과의 호흡을 묻자 정재영은 "내시가 왕과 무슨 케미스트리(배우들이 연기할 때 뿜어져 나오는 일종의 화학작용)가 있겠느냐?"고 모른 척했었다. 하지만 기대감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에게 뜻밖의 '케미'가 뿜어져 나와 관객을 즐겁게 한다.
두 사람의 '케미'가 의외이긴 한데, 현빈 복귀작이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한 것과는 달리 '역린'은 현빈이 주인공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줬다. 이재규 감독이 현빈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듯하다고 하자, 정재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감독이 현빈을 120% 활용했다고 생각해요. 줄거리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죠. 입체적인 행동이나 줄거리 안에서 뭔가 사건이 있을 줄 알았겠지만 그것보다 현빈은 왕으로 나온 거잖아요. 사실적인 인물이니 캐릭터를 허구적으로 재해석하는 건 엄청난 부담이죠. 정조가 날아다니면서 액션을 한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 영화를 보고 '누가 주인공이야?'라는 생각은 유치한 것 같아요. 애초에 그런 시도도 아니었고요. 다만 나와 조정석 비중이 컸던 게 사람들의 불만이었던 건가 봐요."(웃음)
정재영은 연출자를 향한 애정을 인터뷰 내내 드러냈다. 알고 보니 이재규 감독 역시 정재영을 향한 애정이 많았던 것 같다. 과거 이 감독은 드라마 '다모'를 위해 정재영에게 러브콜을 보냈었다. 하지만 정재영은 다른 작품에 출연해야 했기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 감독이 정재영을 이미 점찍어뒀던 셈이다. 이 감독은 영화 연출 데뷔작에 정재영을 높은 비중으로 활용했다. 사실 정재영은 이번에도 이 감독의 요청에 응하지 못 할 뻔했다. 전작 영화 '플랜맨'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는 좋았는데 스케줄을 겹치게 촬영할 수는 없으니까 출연 거절을 하려고 만났죠. 거절하는 자리였는데 감독님이 '플랜맨'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제작진을 설득하겠다고 말하는데 참 좋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합류하게 된 거예요. 물론 '플랜맨' 끝나기 전에 '역린' 촬영이 시작되긴 했지만 현빈 분량부터 찍고 나서 나중에 합류했죠."
정재영은 "한지민이 혹평에 속상해하고 걱정하더라"며 "나는 솔직히 못 느꼈는데 말투 등에 대해서 정말 안 좋은 말들을 써놨더라"고 안타까워했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도 있고 칭찬을 들을 때도 있다는 말로 한지민을 다독였다"는 정재영은 "나도 만날 그런 얘기를 듣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연기자는 평생 들을 얘기"라며 "사람들이 나를 보고 '쟤는 연기 많이 하는데 만날 똑같아'라고 한다. 나는 항상 다르게 하고 싶어서 다른 캐릭터, 영화들을 골라서 하는데 만날 똑같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을 많이 한다"고 웃었다.
현빈과는 붙는 신이 많았다. 극 중 적대 관계인 한지민-현빈과는 달리 정재영은 그림자처럼 현빈과 함께했다. 그는 "현빈과는 정말 편한 사이였다"며 "내가 아줌마처럼 현빈 옷도 입혀줬다"고 웃었다.
영화의 흥행이 현빈과 정재영의 팬 덕분이라고 하니, 정재영은 "현빈 팬 덕"이라고 정정했다. "무대인사를 도는데 콘서트를 방불케 하더라고요. 팬들의 갈증이 엄청났나 봐요." 그는 아내 이야기도 덧붙였다. "현빈 보려고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청탁(?)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VIP 시사회를 안 했는데 다행인 것 같아요. 오히려 속 편하다고 하던데요? 누구는 데려가고 누구는 안 데려가고 정해야 했으니까요."(웃음)
지난해 정재영은 영화 '열한시', '방황하는 칼날', '플랜맨', '우리선희'까지 출연했다. 강행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생각만큼 바빴던 것 아니라고 했다.
"2년에 세 작품씩 하다가 작년에 한 작품 더 한 거예요. 한 작품 더해도 괜찮겠더라고요. 이제 5년 후면 50대에요. 50대가 되면 할 수 있는 역할도 많지 않고 이야기 자체도 많지 않잖아요. 30~40대보다 평면적인 역할이 들어올 것이고 경쟁률도 치열해지겠죠. 5년 후를 위해 준비한 게 있느냐고요? 아직 그런 건 없어요.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죠."(웃음)
정재영은 TV 드라마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찾는 이들이 없다고 했다. 물론 몇몇 작품 제안이 들어오지만 자신이 출연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영화만 출연하고 있는 이유다. 드라마, 광고도 은근히 바라고 있는 눈치인데 쉽지 않다. 그럼에도 강조하는 건 있었다.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야 출연하는 거예요. 캐릭터는 두 번째죠. 연극이나 영화는 엔딩까지 볼 수 있지만 드라마는 그게 아니니 망설이는 점도 있긴 하지만요."
jeigu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