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록밴드 이브는 2000년대 ‘아가페’ ‘아윌 비 데어’(I’ll Be There) 등을 내놓으며 15~20만 장의 앨범 판매량을 자랑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보다 더 이전, 걸(GIRL)이라는 밴드로 활동할 당시의 인기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의 인기가 무색하게 지금 대중들에게 이브는 그저 과거의 가수, 또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누군지도 모르는 가수가 되어 버렸다. 인기를 누리던 그 당시에도 이브는 대중적인 인지도보다 마니아 팬층이 두터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브는 지금도 그 마니아 팬들을 위해 여전히 음악을 놓지 못했다. 아니 놓지 못했다기보다, 놓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은 설명일 거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펍(PUB)은 물론 그의 일상 모두가 ‘음악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과거의 인기를 모두 내려놓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여전히 팬들을 만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며 음악 시작, 공사장 정규직이라 부를 정도.”
김세헌은 20살이 되던 해 공사장에서 막일(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노가다)을 해가며 밴드활동을 시작했다. 공사장 정규직이라고 부를 정도로 매일, 매달 일을 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시 그는 익스타시(EXTASY)라는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해 클럽 투어를 했다. 지금처럼 클럽공연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스무 살부터 스물다섯까지 만 5년 동안 400회의 공연을 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95년이 되던 해에 크림레코드와 손잡고 정식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익스타시라는 이름이 활동에 제약을 받을까 염려해 바꾼 이름이 ‘걸’이었다. 글램록을 추구하는 밴드로 거듭난 밴드 걸은 ‘아스피린’으로 방송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데뷔와 동시에 정점을 찍은 셈이다.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송골매 이후 당시 록밴드가 1위를 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밴드 음악에 대한 시선이 좋지는 않았죠. 투자자도 없었고, 앨범을 내주려는 사람들도 없었어요. 그러다 과거에 밴드를 하셨던 Mnet 사장이 우리를 눈여겨봤던 거죠. 그래서 크림레코드의 1기로 데뷔를 하게 됐어요. 데뷔와 동시에 ‘대박’을 쳐서 소속사는 논현동에 빌딩을 샀어요(웃음).”
소속사는 승승장구했지만 정작 아티스트에게 돌아오는 건 극히 일부분이었다. 가장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을 시기지만 역시나 돈이 애먼 곳으로 새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가수들을 만나면 꼭 한 번씩 나오는 ‘사기’ 사연은 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 총 65만 장의 앨범을 팔았지만 이들에게 통보된 것은 6만5000장이었다. “가장 전성기가 가장 암흑기”라고 말하는 김세헌은 원래 받아야 할 금액의 10분의 1도 채 못 받았다고 했다. 수많은 행사와 가리지 않고 했던 방송들, 음반 판매량까지 더해 워낙 큰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자신들이 만들어 낸 콘텐츠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충분히 분노할 만하다.
그래도 의리를 지키겠다고 소속사 사장과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2집을 냈지만 또 사기를 당하고 제대로 한 번 무대에 서지도 못하고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이 사기로 인해 밴드가 해체될 정도로 큰 위기를 겪었다. 심지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소송까지 벌였던 김세헌에게 남은 건 빚뿐이었다.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을 다 털고도 모자랄 만큼의 소송비를 감수할 정도로 그에게 큰 상처였다.
“멤버들이 가수라는 직업에, 그리고 음악 자체에 회의를 느꼈던 시기였죠. 정식 데뷔로는 2년 차이지만, 언더그라운드에서 8년 가까이 음악에 뜻을 가지고 함께 하던 친구들이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어요. 결국 혼자 소송을 걸었어요. 결국은 (사기 친 매니저를) 찾아내서 합의를 했지만요. 사실 그렇잖아요. 사기를 칠 사람은 치고, 끝까지 가는 사람은 가고. 그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어요.”
“부채(負債) 갚아주는 조건으로 다시 시작된 노예계약.”
해체 후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김세헌을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과거 매니저였다. 그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한 번 손을 잡자는 제안과 함께 말이다. 그는 또 용서했고, 소송으로 인해 얻은 부채를 갚아준다는 조건을 내세운 월드뮤직과 계약했다.
문제는 그새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업타운, 샵, 컨츄리꼬꼬 등이 소속된 이 회사에서 자신의 색깔을 잃어갈 위기에 처했다. 여자 가수와 듀엣, 댄서들과의 콜라보를 제안하며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만들고자 한 회사와 마찰이 생긴 것이다.
“사장이 록음악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래서 트러블도 많았고, 1집을 내고 공백이 좀 있었죠. 제가 하극상을 좀 했거든요(웃음). 제가 하던 장르를 파괴하려고 하셔서. 뭐 지금으로 말하면 씨엔블루 같은 도련님 밴드를 원했던 거죠.”
어찌되었든 그는 밴드 이브로 점차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 마니아 팬층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 싶다. G.고릴라가 멤버로 합류하면서 이들은 최고의 비주얼 록밴드, 글램록계의 대표주자로 자리하게 됐다.
1집 앨범 ‘너 그럴 때면’으로 7만장, 2집 역시 그 비슷한 수준의 판매고를 올리더니 3집 ‘아가페’로 15만 장을 찍었다. 심지어 3집 앨범의 흥행을 통해 1집과 2집 역시 15만 장을 기록했다. 4집 ‘아윌 비 데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역도 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넥스트 이후 만 명 정도의 공연을 성사시킨 사람은 없었어요. 지금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밴드 자우림이나 윤도현은 그 당시(3집 활동) 23위, 50위권에 있었을 때니까요. 문제는 인지도였죠. 그렇게 최고 잘나가는 록밴드가 됐죠(웃음).”
그런데 무대 설비에 몇 천만 원 의 제작비를 들이다 보니 수익금은 소극장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이브는 공연의 질을 우선순위로 두고 ‘퍼포먼스의 끝’을 보여주곤 했다. 제법 순탄했던 앨범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5집 때부터였다.
G.고릴라가 월드뮤직과 솔로로 계약을 했다. 김세헌은 5년 계약 중 마지막 1년을 남겨두고 “진짜 노예였다”고 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나라에 경제위기까지 닥쳤다. 음반 판매량은 정확히 절만으로 줄었다.
2003년에는 이전 이브 멤버들이 해체하고, 네미시스의 하세빈, 내귀에도청장치 정유화가 합류한 새로운 이브를 결성하고 플래닛이브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그렇게 내놓은 6집과 7집은 예전만 못했지만 중박은 쳤다.
“또 사기…일본으로 도피, 그리고 다시 원점”
이번에도 또 매니저가 속을 썩였다. 매니저가 공금횡령을 하고 돌연 사라졌다. 밴드 걸 활동을 접었을 그 당시처럼 또 그는 빚만 떠안고 8집 활동을 접게 됐다. 그는 한국을 떠나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유학을 핑계 삼아 나갔지만 사실 이는 도피나 다름없었다.
그간 몇 차례의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그저 그런 듯 넘겼던 김세헌이 ‘위기’였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일본에서의 생활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2009년, 그는 과거 누렸던 절정의 인기를 뒤로하고 20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말 피하고 싶었어요. 내가 죽어도 이 한국 땅에서는 죽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떠났죠. 아버지 간호 때문에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요. 그 시기는 정말 위기였어요. 20년 만에 소규모 록페를 돌아다니면서 다시 원점으로 온 것 같았어요.”
그로부터 그는 두 장의 싱글 앨범을 내고 일본에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또 일본 생활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밴드 아우라와 ‘그레이트 미트 2010 이브 & 아우라’란 제목으로 서울 서교동 롤링홀에서 콘서트를 하고 일본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발매한 앨범들로 총 130만장 이상을 판매했지만 그의 주머니에 남은 건 몇 푼 없었다. 겨우겨우 모아둔 돈으로 2012년 펍을 차려 생계를 꾸려나갔다.
“음악으로 돈을 벌려는 마음을 버리고 누구나 들어도 최고의 음악이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대중성과 상업성에 미련을 버리다 보니 음악의 질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하죠. 마음 편히 음악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지난해 새 밴드를 결성했다. 글램메탈 밴드 더 히스테릭스(THE HYSTERICS)라는 이름으로 뭉친 이 그룹은 내달 중순 6곡이 담긴 미니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브 때와는 또 다른 음악을 선보인다.
“이브가 소녀적인 감성, 심오한 코드 진행이 특징이라면 히스테릭스는 굉장히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매력이 있어요. 월드뮤직 시장을 예상하고 전곡을 영어로 제작했어요. 일본부터 중국, 서양까지 진출할 생각이에요.”
또한 그는 향후 일본 등과 록페스티벌을 교류할 수 있는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겠다는 것이다. 짧은 일본 생활 이후 몇 차례 일본과 교류한 그는 자신만의 루트를 개발해놓았다.
“내 밥그릇만 챙겨도 누가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최대한 공유하고 싶어요. 사실 국내 아티스트들이 실력적으로 뒤처지지 않아요. 루트가 없기 때문에 진출이 어려운 거죠. 제 노하우를 꽁꽁 싸매고 있는 것보다 함께 나누면 더 좋잖아요.”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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