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MBN스타 박정선 기자]
‘큰일이다’ ‘눈을 보고 말해요’ ‘매일매일’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한때 인기를 끌었던 V.O.S 리더 박지헌은 솔로로서도 대중들에게 인정받았던 가수다. 최근 결혼 발표를 한 그는 과거 팀에서 탈퇴하고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업에 실패해 낙향한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음악을 놓지 못했다. 현재 대중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그는 최근에도 앨범을 발매하는 등 활동을 쉬지 않았다. 과거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논란들과 그에 대한 박지헌의 진솔한 생각을 듣기 위해 신사동 한 카페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인터뷰에 앞서 가수 박지헌, 남편 박지헌, 아빠 박지헌의 인생그래프를 부탁했다. 생각과 달리 굴곡이 심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하자”는 기자의 말에 그는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진짜 솔직한 대답”이라며 계속해서 펜을 굴렸다. 인생에서 가장 힘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던 시기도 제법 높은 수치에 자리했다. 긍정적인 성격이리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란다. 그는 “난 약하고 불안해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그럼 도대체 그래프의 기준이 뭘까.
◇ 가수가 단지 ‘꿈’이 아니었던 그 시절
박지헌은 “가수가 꿈이 아니었다”며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과거를 회상했다. 그 시절,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도서관의 로비, 그 곳이 만남의 장이었다”는 그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다녔다며 그 시절을 되새겼다. 당시 ‘노래방 문화’라는 것이 생기고 처음 갔던 그 곳에서 그는 음악에 남다른 재능 발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가수는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저 노래를 좋아했고, 흔히 말하는 겉멋이 든 음악 하는 친구 정도였다.
“헝그리정신이 유행할 때라서 억지로 헝그리를 만들었죠. 밥 사먹을 돈이 있어도 깻잎 통조림을 사서 하나 꺼내놓고 지하실에서 함께 음악을 했죠. 그땐 무엇인가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했어요.”
그는 “꿈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할 뿐 ‘꿈’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 때가 가장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박지헌의 이런 사고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아버지는 집의 지하에 있는 한 평 반짜리 지하실에 그를 위한 연습실을 마련해줬다. 당시 우리네 부모님들은 ‘딴따라’라며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할 법도 한데 말이다. 모든 걸 차치하고 아들이 즐겁다는 것 하나 만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렇게 즐겁게 음악을 하던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닥쳐왔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지만 군 입대는 그의 인생그래프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버지에게 많은 걸 배웠는데 군의 즐거움은 알려주시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농담이고요. 근데 정말 가기 싫었어요. 공군이 가장 편하다고 해서 자원입대했는데 복무기간이 4개월이나 길더라고요. 입대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엄청난 좌절을 겪었어요.”
좌절했다고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 시간”이라고 했다. 반 우스갯소리로 군 입대가 인생의 가장 바닥이었다고 했지만 사실 그에게 군은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그로 인해 군에 밴드가 창설됐고(지금까지 그 밴드가 이어지고 있단다), 아내에 대한 사랑도 더욱 깊어졌다. 막간을 이용한 아내 자랑 타임을 주기로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아내였어요. 당시 군 생활 2년 6개월, 주로 따지면 대략 120주 정도 될 거예요. 매주 한 번씩 면회가 가능했는데, 120번 왔어요. 그 기록은 지금도 깨질 수가 없어요. 이제 복무기간이 더 짧아졌으니 더더욱 그렇죠. 가족이라는 것에 정말 감동했어요. 저는 사실 어떤 상황에 좌절하는 성향을 타고났는데 음악과 아내 때문에 버틸 수 있었어요.”
◇ 꿈이 가수가 된 박지헌, 그리고 가족들의 007작전
꿈이 없어서 자유로웠다고 말했던 그는 제대 이후 처음 가수를 꿈꿨다. 꿈을 위해 고향인 대전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무릎을 피지도 못하는 다락방에서 그의 첫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함께 음악 하던 사람들의 소개로 한 작곡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말이 좋아 문하생이죠. 속된 말로 시다바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게 그 분을 보필(?)하다가 얼마 지나자 ‘연습실에 나오라’며 지하실을 내줬어요. 아무것도 없는 연습실에서 무작정 노래만 불렀어요. 집에서 챙겨온 오이지에 밥을 해먹어 가면서요.”
27살이 되던 해,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지만 그 결심과 동시에 오디션 합격 소식을 접했다. 당시 걸그룹 쥬얼리가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그는 쥬일리의 소속사인 스타제국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두 번째 팀 V.O.S로 데뷔하게 됐다. 당연히 가족 모두가 결혼을 미루는 것에 합의하고 데뷔를 허락했다.
데뷔 당시 큰 반향은 없었지만 2006년, 대중들에게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당시 그에게 첫 아이가 생긴 것이었다. 이때부터 박지헌 가족들의 007 작전이 시작됐다. “욕심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어요. 사생 팬이 생겼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끌어안고 나오면서 ‘왜 나한테 아기를 맡기는 거야’라며 남의 집 아이처럼 연기를 해야 했어요. 말 그래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죠. 그러다 2008년 슬슬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봤다’는 식의 글들이 올라왔어요. 정말 솔직한 마음을 얘기하자면, 그때 정말 겁이 났어요. 인기에 대한 모순을 맛본 케이스죠.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전 더 힘들어졌으니까요.”
아이를 낳고, 이를 숨기면서 인기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 인기가 아이로 인해 끝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가수로서의 인생이 끝나더라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급한 마음에 시작한 사업이 잘될 리 만무했다.
◇ 세상에 내놓은 가족사, 오르락내리락 인생사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2009년 그는 가족들을 세상에 드러냈다. 더 이상 가족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는 생각에 공개한 그 시기, 몸담고 있던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났다. 재계약 없이 신생 기획사를 선택한 V.O.S는 팀명과 관련된 논란 등 각종 일들 때문에 사실상 활동이 어려웠다. 심지어 이 기획사가 재정적 문제로 문을 닫기까지 했다.
이때 그들의 고향 격인 스타제국에서 다시 손을 내밀었지만 멤버 3명 중 박지헌만 이 제안을 거절했다. 전 기획사에서 계약금도 책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때문에 어디와 계약을 해도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경록과 최현준은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힘들어지는데 꼭 그렇게 해야겠냐”며 박지헌에게 함께할 것을 부탁했으나 그는 완고했다.
“그 기획사에 있을 때 삶이 힘들어서 나왔는데 인기를 회복한다 하더라도 그 삶을 다시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결정이 두 멤버들에게는 상처가 됐죠. 그리고 ‘보고 싶은 날에’ 등 솔로로 히트했던 곡들이 있어서, 그 캐리어가 자만심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해요.”
이 선택으로 그는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다. V.O.S로 활동할 당시에는 어찌되었든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차근차근 빚을 갚아나갔지만 혼자가 된 그는 결국 귀향길에 올랐다. 대전의 월세 방에서 생활하면서 전국으로 레슨을 다니고, 행사, 결혼식, 동창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아기를 키울 수 있는 아빠로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고, 아껴야하고, 가족들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써야하고, 얼마나 사랑하면서 살아야하는지 알았죠. 정말 값지고 즐거운 시기였어요. 굉장히요.”
그리고 2012년 그는 의류 사업을 시작하고, 이를 계기로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사업이 제법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자 그는 이 사업을 아내에게 맡기고 다시 음악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발로 뛰었다. 그러다 그는 지금의 소속사를 만나 꾸준히 앨범을 발매했다. 사실 고향에 내려가 생활하는 동안에도 그는 O.S.T나 싱글 등 계속해서 팬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올해가 V.O.S의 데뷔 10년째 되는 해다. 재결합, 혹은 완성체로서의 앨범을 기대해볼 법도 하다. 더구나 최근에 그는 직접 재결합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멤버들을 직접 찾아가 “내 마음은 항상 열려 있다”고 말한 것이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는 내심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분명하게 제 생각을 전했어요.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순 없으니 저도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있겠다고 했죠. 올해 저의 목표는 계속해서 곡을 선보이는 거예요. 처음에는 한곡, 그 다음엔 두곡. 이번에 내는 앨범에는 세 곡이 담기겠죠? 옛날보다는 훨씬 작은 무대, 어려운 무대들 많이 겪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이 정말 행복해요. 결과보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와 명분이 확실하거든요. 숨기지 않는 삶이 너무 마음이 편해요(웃음).”
또 그는 오는 12일 22년간 풀지 못했던 숙제, 바로 결혼식을 올린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넷째 아이의 임신 소식까지 알렸다. 결혼식에 임신까지 겹경사를 맞은 셈이다. 직접 만난 박지헌은 정말 행복함에 가득 차 있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왜 인생그래프의 수치를 높게 책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생그래프가 시작된 93년부터 지금까지 그에게는 항상 가족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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