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고창군청 |
1812년 한양에서 태어난 신재효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고창으로 내려갔다. 친척이 고창현감으로 제수받자 함께 내려간 것이다. 그곳에서 약방을 차린 신재효의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신재효는 이렇게 고창에서 기반을 다진 아버지 덕분에 서리 노릇을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다. 보통 서리라고 하면 가난한 백성을 쥐어짜는 악독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는 이미 부자였던 터라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 덕분에 젊은 시절부터 풍류를 즐기던 그는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판소리는 지금처럼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으로만 전해졌다. 악보나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자의 양성에 실패하거나 스승이 갑작스럽게 죽을 때는 맥이 끊길 위험성이 높았다. 신재효는 이런 판소리들의 체계를 정리하는 작업에 나섰다. 춘향가와 심청가 등 여섯 마당으로 판소리들을 나누고 일종의 대본을 만들어서 누구나 배우고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다. 아울러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꾸미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역시 집안에 거처와 연습실을 마련해서 판소리 명창들을 길러냈다는 데 있다. 김세종과 정춘풍 같은 남성 판소리 명창뿐만 아니라 진채선을 비롯한 여자 판소리 명창들도 후원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더라도 광대로 취급받으며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후원자에 머문 것이 아니라 판소리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직접 노래를 작곡해서 창작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만약 신재효가 나서서 판소리를 정리하지 않고 명창들을 후원하지 않았다면 판소리 노랫가락들의 상당수는 사라졌을 것이다. 신재효의 이런 후원을 할 일 없는 부자의 취미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부유한 중인처럼 돈으로 벼슬을 사거나 한학을 공부해서 양반행세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인 판소리를 후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예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아울러 양반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는 대신 서민들의 해학과 웃음, 그리고 풍자를 그대로 살려놓음으로써 예술적인 가치도 높였다. 비록 스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스타를 길러낸 더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는 부자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서 고을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가진 재물을 풀어서 이들을 구율 했다.
정명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