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는 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옆집 총각 추상박(유아인). 새로 이사 온 모녀가 생쥐에 기겁하자 자신이 잡아주겠다고 호기롭게 보일러실 문을 연다. 현숙은 상박이 "듬직하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상박이 혼비백산 도망가는 게 다음 장면이다. "사이즈(쥐의 크키)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며 눈물을 찔끔 흘리는 표정이다.
아무 말 없이 세상을 떠난 14살 소녀 천지(김향기)가 숨겨놓은 비밀을 찾아가는 엄마 현숙(김희애)과 언니 만지(고아성), 그리고 친구 화연(김유정)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우아한 거짓말'(감독 이한)에 깜짝 출연한 배우 유아인의 첫 등장 모습이다.
이 감독은 유아인의 이 상황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는데, 유아인의 깜짝 놀라는 표정과 휘날리는 머릿결이 포인트로 살아나 관객을 폭소케 한다. 코믹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유아인의 모습이 전혀 색다른 것이라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추상박은 또 모녀가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지만 낑낑대는 모습을 보여 완벽하다거나 듬직한 남자로 보이진 않는다. 동네에 배달된 자장면 가게 그릇이 없어지자 의심받는 존재이고, 현숙이 만호(성동일)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 같아 또 호기롭게 나서는데 줄곧 얻어맞는 인물이다. 돈 1000원 때문에 경비 아저씨와 실랑이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지질하면서 궁상맞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기존 우리가 알고 있던 유아인이 아니다. 전작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리긴 했지만, '우아한 거짓말'에서는 차원이 다르다.
이 감독은 유아인을 '우아한 거짓말'에서 제대로 활용했다. 지난 2011년 영화 '완득이'의 주인공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이 감독이지만 미안할 정도로 유아인을 망가뜨린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이 감독은 "처음부터 유아인을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지만 주위에서는 "유아인이 출연 해주겠냐?"고 걱정했을 정도다.
이 감독은 25일 언론시사회에서 "솔직히 '아니면 말고'였는데 고맙게도 출연해줬다"고 좋아하고 만족해했다.
물론 이 감독은 유아인을 코믹한 캐릭터로 소비한 것만은 아니다. 천지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유아인은 또 다른 열쇠 중 한 명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감독은 영화가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라서 숨통 같은 부분이 필요해 유아인을 기용했다고 한다. 이 감독의 말처럼 쉽지 않은 주제인 집단 괴롭힘에 따른 자살이라는 소재는 유아인 덕에 한층 밝아졌다.
'우아한 거짓말'은 무겁고 어려우며, 또 한편으로는 불편한 소재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딸을 잃은 엄마와 언니, 그리고 여학생들의 섬세한 감정을 풀어나가는 이한 감독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슬픔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는 생각할 거리도 던져준다. 무겁지만은 않다. 또 가볍지도 않다. 관객의 동의는 충분히 얻을 것 같다. 3월13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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