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형사('내가 살인범이다')나 채권추심원('카운트다운'), 문제 많은 야구선수('글러브'), 의뭉스러운 할아버지('이끼') 등 무겁고 어두운 역할을 했던 정재영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아는 여자'에서 잘 나가던 투수였지만 별 볼 일 없던 외야수 동치성 역할을 맡았던 그는 극 초반 애인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가, 가란 말이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며 그 무렵 이온음료 광고에서 정우성의 모습을 패러디해 관객에게 웃음을 줬다.
그런 그의 진지함 속에 드러나는 웃음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플랜맨'의 개봉은 반가운 일이 분명하다. '플랜맨'에는 과거 정재영이 출연한 '김씨표류기'나 '웰컴 투 동막골'의 모습도 있다. 코믹 본능 가득한 정재영의 귀환이다. 웃음이 오롯이 전해질 수밖에.
사실 '플랜맨'은 제목이 그렇게 관람 욕구를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1분 1초까지 계획대로 살아온 남자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이 남자가 자신의 계획에 없던 여자를 만나 짝사랑에 빠진 뒤 생애 최초로 '무계획적인 인생'에 도전하며 벌어지는 코미디? 이것 참, 유치해 보여도 이렇게 유치할 수 없다.
결벽증, 강박증이 심한 인물인 정석(이름마저도 별로다)은 정확한 계획에 따라 살아간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침대와 이불의 각을 잡는 등 청소하는데 2시간여를 소비하고, 출근한다. 12시15분에는 점심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온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그는 동료들의 행동이나 모습이 다 마음에 안 든다. 옷에 머리카락이 묻어 있고, 책상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는 걸 못 본다. 정석은 또 계획에 어긋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한다. 아니, 불안해한다. 분마다, 아니 초마다 계획을 세워놓는 인물이다. 약간 어수룩한 모습으로 관객을 웃기려는 의도가 빤히 보여 싫증이 났는데, 어느 순간 그의 생활과 삶에 몰입되고 만다.
사실 정석은 무계획적인 삶으로 지원의 마음을 얻으려는 계획이었다. 소정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잘 쳤던 정석은 소정이 서바이벌 음악프로그램에 도전하는 데 도움을 주고,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출근 8년 만에 지각하고 조퇴하는 일이 생기고, 정석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음악 프로그램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병수(최원영)는 소정과 과거 좋지 않은 소문이 있던 사이임을 알게 되고 연민을 느낀 정석은 더욱더 소정과 가까워진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했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신선하다. 계획적인 남자와 무계획적인 여자의 대비가 특히 흥미롭다. 또 천재 소년에게 쏟아졌던 지나친 기대로 인생이 망가진 인물의 비애도 전해진다. 지나친 관심은 "노 땡큐!"라는 영화의 의미는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전한다. 정석의 과거가 드러나는 과정과 지점 때문이다. 결벽증, 강박증이 심해진 이유가 드러나는 후반부는 초반과 장르적으로 동떨어져 보여 아쉬움을 줄 순 있다. 하지만 나름의 반전이 관객의 관심을 높이기에는 충분하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