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당시 윤여정은 충무로와 여의도의 가장 핫한 여배우였다. 1969년 방송된 MBC ‘장희빈’에서 보여준 장희빈 연기는 두고두고 후대 장희빈을 맡은 배우들에게 롤모델이자 벽이 됐고, 고 김기영 감독은 그녀를 자신의 최고작품 중 하나인 ‘화녀’와 ‘충녀’에 출연시켰다. 박철수 감독, 김수현 극본의 영화 ‘에미’ 역시 윤여정의 대표작 중 하나다.
결혼과 휴식기 등 세월을 거치며 작품 속에서 윤여정의 비중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매번 다른 작품 속에서 전혀 새로운 캐릭터들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연기 내공만큼은 소름끼칠 만큼 농밀한 배우다. 주로 드라마 작품에서는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 연기를 선보이지만, ‘돈의 맛’ 같은 영화에서는 돈과 권력, 색에 빠진 여인을 연기하기도 했다.
고현정을 당대 최고의 여배우 중 한 사람을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선덕여왕’의 미실과 ‘대물’의 여자 대통령 서혜림 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고현정 외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토크쇼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실제 성격 역시 직설적이고, 화통해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여배우다.
두 배우가 처음만난 건 약 20년 전 MBC 드라마 ‘여자의 방’에서다. 이후 고현정은 윤여정을 꾸준히 따랐다. 두 사람은 2010년 영화 ‘여배우들’에서 다시한번 호흡을 맞추며 당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MBC 새 수목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 고현정이 윤여정에게 출연을 조심스럽게 부탁한 것도 이 같은 인연 때문이다.
지난 4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드라마 ‘여왕의 교실’ 제작발표회는 대부분이 아역배우들로 이뤄진 까닭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단연 ‘여왕’ 고현정에게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 이날 행사장을 들썩이게 한 것은 윤여정이었다.
윤여정은 “나는 단역이다. 캐릭터도 아직 설명을 제대로 못 들어서 모른다. 이제부터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짧게 인사를 하면서부터 장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윤여정은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인 까닭에 의례 나온 ‘초등학교 시절 모습은?’이라는 질문에 “60년 전이다. 정말 죄송하다 기억이 잘 안난다. 60년 후에 기억할지 생각해봐라. 조사해볼 수도 없다. 다 돌아가셨을 거다”고 말해 장내를 한번 뒤집었다. ‘실제 선생님이면 어떤 철학을 가진 선생님일 것 같냐’는 질문에는 “교육자가 아니니깐 철학이 없다”고 수줍게 말했다.
윤여정은 이 작품에 고현정의 권유로 출연하게 됐다. 고현정은 “내가 ‘여왕의 교실’에서 맡은 마여진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다 알고 있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교장선생님이 등장한다. 윤여정 선생님이 떠올랐다. 실제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분이기도 하고, 이렇게 얼굴을 뵙고 싶어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렸다”고 설명했다.
윤여정은 고현정에 대해서도 “얼굴 예쁜 배우들이 연기를 말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고현정은 예쁜데 연기도 잘해서 놀라고 예뻐했다”고 말하면서도 ‘가장 부러운 후배 여배우’라는 과거 언급에 대해 “지금은 살쪄서‥”라고 톡 쏘는 한마디를 던져 듣고 있던 고현정을 파안대소하게 했다.
이날 제작발표회에서 윤여정은 ‘단역’이라는 이유로 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연기에 임하는 거창한 각오, 캐릭터에 대한 심오한 해석, 미사여구를 동원해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윤여정이 한번 입을 뗄 때 마다 장내는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여배우는 무엇이다라는 정의는 배우, 감독마다,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만약 여배우를 어떤 자리에서도 어떤 배역을 맡던 세상이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윤여정은 여전히 독보적인 여배우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현우 기자 nobodyin@mk.co.kr/사진 팽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