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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제가 기계에 둔해서 아직도 이걸 써요. 고장 나서 진동이 안돼요.”
멋쩍은 미소를 띈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도 소녀처럼 핸드폰을 꼭 쥐며 발을 동동 굴었다. ‘천생 사랑스러움이 몸에 밴 사람이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2007년 결성한 밴드 라즈베리 필드는 현재 소이의 원맨밴드가 됐다. 정규앨범 작업 중 멤버 장준선이 중도하차 하게 된 것. 그는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2년여의 작업 끝에 지난 1월 라즈베리 필드 1집 ‘Sweet&Bitter’를 냈다. 지난16일 단독 콘서트도 가졌다.
“혼자서 활동하려니 부담이 컸어요. 각자 역할이 분명했는데 지금은 그걸 혼자 다해야 하니까요. 거기에 모든 책임이 오롯이 제 몫이 되니 겁도 나고. 한편으론 외롭기도 했어요. 특히 음악적, 정신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이 버거웠어요. 하지만 결국 모든 과정의 끝에는 ‘해냈다’는 벅찬 감격이 몰려왔고, 한 뼘쯤 성장했음을 깨달았죠.”
아이돌 출신 여가수의 이같은 행보는 일반적이지 않다. 걸그룹에서 춤을 추고 랩을 하던 퍼포먼서에서 밴드 음악을 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된 사례는 소이가 유일할 것이다.
“5살 때는 홍콩에 있었어요. 당시 유치원에서 비틀즈 음악을 처음 배우게 됐는데, ‘이게 음악이구나’ 생각했어요. 정말 좋았거든요. 그렇게 음악에 미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밴드 음악을 하는 건, 밴드 음악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몸에 배어 버린 탓일 거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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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4년 중학교를 졸업한 해, VJ로 방송 데뷔를 했다. “제가 MTV를 정말 좋아했어요. 집에는 케이블 방송이 안 나와서 MTV보러 매일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죠.(웃음) 그러던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VJ 선발 대회 공고가 신문에 난 거예요. 어머니께서 제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지 아시니까 대회에 나가보자고 권하셨고, 운 좋게 합격해 활동을 잠깐 했죠.”
그러나 이내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아버지의 미국 발령으로 그만뒀어야 했다”며 “가족과 떨어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조차 없었기 때문에 대학진학만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이어 “당시 SES 멤버를 찾고 있던 이수만 사장님이 ‘별밤 뽐내기’에 출연했던 언니를 만나기 위해 LA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다”며 “도망간 언니 대신 자리에 있던 내가 즉석에서 캐스팅이 됐다. 호기심에 입시공부와 데뷔 준비를 병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노래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단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도전했는데 병행이 너무 힘들었다. 내겐 대학입학이 가장 중요했다. (데뷔 준비를)한 달 만에 그만두고 학업에만 매진했다”고 했다.
이후 소이는 고려대학교 중문과에 입학, 재미삼아 친구와 함께 참가했던 걸그룹 티티마 오디션에 합격해 본격적인 방송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가수다 되겠다’는 일념이 아니었다. 라디오 PD가 되기 위해 현장 경험을 쌓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티티마로 약 2년 동안 활동하면서 대중에게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내 모습 같지 않았다’며 자진 탈퇴했다. 그리고 연기 영역으로 활동 스펙트럼을 넓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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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안의 어두운 면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한 카타르시스였다”며 “내면의 일부분을 표현하는 작업은 일종의 치유였다”고 했다. 소이는 자신을 ‘표현가’라고 칭하며 단편 영화 작업을 한 계기를 설명했다.
“인간 내면의 어두움에 대해 말하고 싶어 실험영상을 만들었어요.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담은 것인데 민망해서 차마 공개는 못해요.(웃음) 이후 단편영화 ‘검지손가락’을 작업했어요. 단 한 명의 인생의 반려자 ‘소울메이트’에 대한 이야기에요.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째 손가락의 검정 매니큐어는 외로움과 어두움을 표현한 것이고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소이는 갓난 아이 때 홀로 방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했다. 우는 것 외엔 할 줄 모르는 갓난 아이가 경험한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서운 기억이었다.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아온 그는 표현하지 못하고는 못 견디는 천상 ‘표현가’였다.
“때에 따라 감성적으로 간지러운 부분들이 순차적으로 찾아와요. 저는 그걸 ‘예술적 변비’라고 불러요. 그리고 이런 때마다 음악, 글, 영상 등 적절한 표현법을 사용해 시원하게 배설(?)하는 거죠.”(웃음)
소이는 2005년 처음 기타를 잡았다. 연주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레 곡을 쓰게 됐고, 2007년 프로젝트 밴드 라즈베리필드를 결성했다. 밴드 이름은 비틀즈의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forever)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다. 유년 시절부터 ‘비틀즈’는 동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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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웨어걸’(Nowhere girl)은 자전적 소설이에요. 주인공 나옥희는 제 자신이고, 그가 동경하는 톰 로메인은 존 레논이에요. 또 그의 밴드 이름이 레이디벅스(Ladybucks)인 것도 비틀즈 이름에서 차용한 것이고요. 어느 날 문득 비틀즈의 ‘애비로드’ 포스터(비틀즈 멤버들이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담긴 유명한 앨범 재킷)을 보다가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 나를 만났다면 나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는데, 그게 단편소설을 쓰는 계기가 됐어요. 정말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 절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상상만 해도 좋아요.”(웃음)
‘까르르’ 웃는 그에게 “아티스트답다”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난 아직 아티스트가 아니다”고 한다.
“일반적인 의미로 통칭해 아티스트라고 부른다면 묻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예술가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아직은 아니에요. 언젠가
소이는 의미 없는 누군가가 아닌,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되고 싶어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뭉근히 남아있는 향기는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염은영 인턴기자/사진=강영국 기자]
인터뷰 ②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