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했다.
우재에게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고 서영에게는 ‘신데렐라의 마법’이었다.
시청률 46%(닐슨코리아 전국기준)를 돌파하며 국민드라마로 자리매김한 KBS 2TV 주말드라마 ‘내 딸 서영이’ (소현경 극본, 유현기 연출)의 인기 비결은 단연 서영(이보영)-우재(이상윤)의 커플의 알콩달콩한 러브스토리였다.
영화처럼 만나 영화처럼 사랑했고 결혼까지 했다. 절대 변치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줬던 이들은 ‘이상적인 결혼 생활’의 표본이 되며, 이들처럼 사는 게 꿈이라는 말들이 터져 나오게 했다.
그러나 이 완벽한 커플은 곧 헤어져버렸다. 왠지 모를 배신감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국민 사기극’이라도 당한 듯 힘이 쭉 빠져버렸다. “이게 다 서영이' 때문이다” 원성이 터져 나왔다. 한때 시청자들의 ‘자존심’이었던 서영은 어느새 ‘역적’이 돼 버렸다.
서영의 잘못이 크긴 했다.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결혼했으며, 이를 털어놓고 이해든 용서든 구할 생각도 없이 결혼생활을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대체 왜 이 여자는 이렇게 끝까지 고고해야만 하나’ 받아들이는 입장으로선 서영의 행동이 쉬이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영은 입을 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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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 전 반드시 들렀다 와야 하는 생각의 정류장이 있다. ‘내가 만일 서영이었다면’ 이라는 역지사지의 정류장이다.
서영은 처음부터 재벌 집 며느리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결혼에 대한 미래를 꿈꿀 만한 처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부모’가 되는 데 두려움이 큰 사람이었다.
우재가 서영의 거짓말을 알게 된 후, 드라마는 우재의 시선으로 그려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서영의 작은 거짓말들은 ‘일대 사건’으로 비쳐졌고 어느덧 서영은 ‘파렴치한 여자’가 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재와 불임클리닉을 다니면서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또 한 번의 엄청난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영은 계획적인 ‘나쁜 여자’가 아니라 치밀한 ‘좋은 여자’였다. 우재의 아이를 낳기에, 한 아이의 부모가 되기에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패륜을 저지른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서영이 큰 결심을 한 듯 피임약을 끊고 드디어 마음을 열었을 땐 우재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심산이었을 것이다. 자존심 강한 서영이지만 ‘부모’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한 ‘통과의례’ 쯤으로 이를 감내하려고 했을 것이다. 결국 그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 이혼하게 됐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떠났던 서영은 ‘뭐 저렇게 독한 애가 다 있어’로 치부될 여자가 아니다.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여자’일 뿐이다. 스스로 꾸려온 고된 인생동안 이 젊은 여자가 깨쳐 온 삶의 진리란 ‘빠른 포기’와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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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영의 가정만큼이나 문제 있는 가정엔 ‘우재네’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정략결혼으로 사랑이라곤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우재의 부모님, 입양아가 아닌 배다른 동생(이정신)인 성재, 집안을 부정하며 사는 미경(박정아)까지. 이쯤 되면 우재의 집도 답 없는 건 매한가지다.
허울 좋은 재벌가 집안의 곪아터진 속내야 쉽게 드러날 리 없었을 터, 서영은 이들과 가족이 되면서 이 집에 감춰진 상처들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게 된다.
눈 밖에 난 며느리로 처음부터 사랑받진 못했지만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 서영이 올곧고 성실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우재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서영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서영으로 하여금 집안은 전에 없던 화목함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성재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일대 위기를 맞이한 우재네를 듬직하게 지켜낸 것은 누구도 아닌 서영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으로 가장 상처를 받았을 우재모 지선(김혜옥)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딸 미경도 못해낸 일을 며느리 서영이 해낸 것.
자신의 이혼이 임박했음에도, 사랑하는 남자의 바닥까지 경험해야 했음에도 서영은 우선 집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자신보다 시어머니와 도련님을 먼저 생각하며 이들을 위로했다. 지금의 지선과 성재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8할은 서영의 응급처지 덕분이었다.
서영은 이제 더는 이 집의 며느리도 아내도 형수도 아니지만 서영이 지켰던 그 자리는 도저히 매워지지 않을 구멍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대신 채워낼 수 없을 만큼 큰 것으로.
● ‘서영이’ 대놓고 편들기step 3. 최후 변론
누구라도 쉽게 ‘패륜’과 ‘파렴치’로 사람을 단정 지어 부를 수 없다. 1분에 60초 1시간에 60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100억의 인구가 저마다의 이 많은 시간을 차마 다 주워 담지도 못하며 살아간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 이 말의 뒷면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기도 하다. 실수와 잘못은 의도치 않게 공공연히 삶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서영은 독하게 떠났다.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보겠단다. 재벌가의 며느리 자리도 반납할 만큼 자존심이 중요했던 게 아니다. 서영은 도도했다기 보다 겸손했다. 자기 분수를 잘 아는 것이 결국 자존심을 지키는 것과 같게
종영까지 이제 단 7회만이 남았다. 서영에게도 기회는 남아있다. 남은 시간 자신과 아버지를 용서하고 새로운 삶의 2막을 멋지게 살아갈 모습이 기대된다. 서영이의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염은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