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유독 하정우에 시선이 쏠린다. 달리는 차에 몸을 내던지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건 기본이다. 돌에 찍히고 유리창을 넘어 고꾸라진다. 상대의 무자비한 발길질도 감내해야 했다. 격투신, 총격전 등의 중심에 하정우가 있는데 이전에 그가 보여준 액션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는 다른 볼거리도 많지만, 하정우를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는 재미가 있다.
이런 '베를린'에서 하마터면 '하대세' 하정우를 볼 수 없을 뻔했다.
류 감독은 최근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베를린'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하정우씨에게 미국영화 제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그것 때문에 서로의 일정을 조율했고, 또 한 번의 위기가 오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황해'와 '추격자'에서 무심한 듯한 하정우의 연기가 좋았다는 류 감독은 '베를린'을 시작하기 몇 년 전 친동생이기도 한 배우 류승범과 함께 하정우와 의기투합해 작품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각자의 스케줄 때문에 2개 프로젝트가 불발된 바 있다. 이번마저 안 되면 안 되는데 하고 노심초사할 수밖에… 다행히 하정우는 '베를린'에 합류했다.
류 감독은 "하정우씨가 '늦게 정리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우리 달리죠!'라고 하는데 정말 고마웠다"고 기억했다. 그는 "하정우라는 배우 자체가 가진 이미지와 상승세의 기운이 우리 영화에도 전해지더라"며 "카메라를 어떻게 찍어도 하정우씨는 꽉 채우는 맛이 있다. 어렵게 연기하는 것도 아닌데 표현도 풍부하게 잘 전해지더라"고 웃었다. 물론 표종성과 조화를 이룬 정진수(한석규), 동명수(류승범), 련정희(전지현) 등 출연진 모두에게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북한 첩보원에 대한 자료를 쉽게 접할 순 없을 테니 그 과정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고 하니 그보다는 캐스팅 이후가 가장 힘들고 걱정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에 '이 영화는 이렇게, 이렇게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완고가 나왔을 때부터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한석규, 하정우 등 배우들이 캐스팅됐을 때는 좋았죠. 하지만 이후부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들의 앙상블을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등등. 별의별 근심과 걱정을 다했어요."(웃음)
규모에 대한 압박과 스타 배우들의 앙상블, 이들을 좋아하는 팬들의 기대치 등을 충족시키려고 애썼다. 강행군으로 평소 체중보다 8㎏이 빠질 정도였다. 위험한 순간도 셀 수 없었다. 아무리 안전장치에 최대한 신경을 쓴다고 해도 돌발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턴트맨이 위험한 순간을 대신 해줬지만 배우들이 연기할 때도 작은 사고들이 잦았다.
특히 뛰고 구르는 게 많았던 하정우는 몇 차례 탈진했고, 무릎 부상 때문에 병원에도 실려가고 했다. 전지현은 총격신 타이밍이 안 맞아 파편이 얼굴에 튀기도 했다. 총알이 볼을 스쳐 지나가 전지현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류 감독의 마음을 졸이게 하기도 했다. 류 감독은 "힘이 들고 위험했지만, 다행히 아주 큰 부상은 없었다"고 안도했다.
'베를린'은 웃음을 원천봉쇄하진 않는다. 하정우와 한석규의 대화 신, 동명수의 특이한 행동들이 의도치 않은 웃음을 준다. 류 감독은 "일부러 웃기려고 하진 않았다"며 "규모가 크니 광대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의 웃음일 뿐"이라고 했다. 특히 동명수에 대해서는 "'이 친구는 본질적으로 성악설이 맞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악당의 느낌을 잘 살려준 것 같다"며 "류승범을 향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보면 새로운 형태의 악당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만족해 했다.
"이제 강박관념은 없어요. 제 영화가 액션을 위한 영화는 아니니까요. 물론 영화 속에 액션이 필요하다면 기존과는 다르게, 좀 더 좋게 만들고픈 생각은 있죠. 그렇지만 액션 자체가 제 의식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액션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고, 현장에서도 액션을 찍을 때 다르다고들 하지만 크게 생각하진 않아요."(웃음)
그의 말마따나 액션을 보여줄 땐 제대로, 관객의 인상에 깊게 남길 정도의 명장면을 선사한다. '베를린'에서도 그렇다. 여러 장면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동명수 일당에 쫓기는 종성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한바탕 격투를 벌이고 유리창을 통해 도망치려하다 여러 가닥의 뒤엉킨 줄에 걸려 떨어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류 감독은 "떡이 그냥 굴러올 때도 있더라"고 웃었다. "그 탈출 시퀀스가 없을 때였죠. 라트비아 리가에 프로덕션 사무실이 있는데 담배를 피우러 밖으러 나왔다가 생각이 났죠. 하늘을 올려다 봤는데 '어, 저기서 종성이 도망치다가 떨어져도 크게 다치진 않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가닥의 선이 엉키는 건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찍을 때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용할 수 있었고요."
이제 개봉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류 감독은 "만족스러운 장면이 하나도 없다"고 농반진반으로 대답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눈에 걸리는데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좋겠어요. 작은 것부터 큰 실수까지 저를 괴롭히네요. 그런데 영화 홍보하러 인터뷰하는 건데 이렇게 얘기하면 좀 그렇겠죠?"(웃음)
약간의 아쉬움을 내비친 류 감독이지만 자신감도 읽힌다. 호평이 꽤나 많은 걸 보면 기대해도 될 만한 작품이긴 하다. 류 감독은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액션 장면이 기억난다'고 하는 것도 좋지만, 인물들에 신경을 썼으니 '누가 멋있었다'거나 '불쌍하다', '징글징글하다'라는 느낌 등 주인공들에 대한 잔상이 조금이나마 남았으면 한다"고 바랐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 사진 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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