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원상(42)을 향한 갈채가 이어진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그는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실제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정도다.
고문 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은 김종태(박원상)의 코와 입 속에 물을 뿌려 기절을 시킨다. 얼굴에 하얀 수건을 덮고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와 입속에 넣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숨을 쉴 수가 없다. 물을 뿌린 몸에 전기를 가해 온몸이 타는 것 같은 장면은 소름이 끼친다. 담요를 덮어 몽둥이질을 하는 건 차라리 덜 아파 보인다. 영화는 1985년 9월,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자격으로 붙잡혀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에서 22일 동안 고문당한 수기를 바탕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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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학번인 박원상은 촬영을 하면서, 또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시기를 지나오며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이 작품을 대했다. 자기 안에 알게 모르게 있는 부채의식이라고나 할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영화를 본 그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옆에는 김 전 상임고문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민주통합당)도 앉아 있으니 숨어서 눈물을 감췄다.
박원상은 정지영 감독과 전작 ‘부러진 화살’에 이어 두 번째 만났다. ‘부러진 화살’보다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박원상은 “십 몇 년을 연극을 해오면서 정 감독님과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부러진 화살’ 때 인연이 찾아와 너무 신나게 작업했고 결과도 좋았다. 내 마음 속에 선생님이자 지표가 생겼는데 바로 두 번째 작업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내민 손을 덥석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 감독을 “큰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또 안성기, 이경영이라는 배우와 한 앵글 안에 잡힌 것에 벅차했다. “‘부러진 화살’ 때 피고인석에는 안성기 선배, 판사석에는 이경영 선배, 카메라 뒤편에는 정지영 감독님이 서 있으셨죠. 저처럼 행복한 순간을 맞은 배우가 또 있을까요?”(웃음)
솔직히 고민은 했다. 제의를 해준 감독에게 고마우면서도 이 역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했다. “네가 그 역할을 한다고?”라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발목을 잡았다. 어렸을 때 물에 빠져 공포를 느꼈던 그가 물고문을 이겨내야 해서 힘들기도 했다.
박원상은 특히 물고문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했다. “첫 물고문 신을 촬영할 때였죠. 몸이 경직이 되는데 뭘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기술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 정말 당황하고 힘들었죠.” 촬영을 할 때 주변 사람들은 박원상이 실제로 고통스러워하는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순간도 왔을 거다. 어떻게 구분했을까.
“손발을 쓸 수 없고 말도 못하며 몸이 묶여 있으니, 못 견기겠으면 머리를 움직여 털어내겠다고 약속하고 촬영을 들어갔죠. 점점 고통스러워지는데 고개를 흔들려고 하는 순간 위에서 제 머리를 누르는 힘이 세지고, 리허설 때는 없던 손이 들어와 어깨를 누르더라고요. ‘아, 이거 사고구나. 내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구나’ 했죠. 한계치까지 갔어요. 다행히 풀려났는데 울먹이며 죽는 소리를 했죠. 형님들도 NG가 나면 더 힘드니 그렇게 하셨던 거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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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상은 그를 향해 쏟아지는 칭찬에 “칭찬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 “분장을 하고 연극 무대에 설 때 나는 항상 그걸 가면이라고 생각했다. 박원상이 아니라 캐릭터로 서있는데 그것을 벗고 나면 다시 박원상이 됐다”며 “연극은 무대 위에서만 그렇게 하는 게 가능했는데 영화 속 박원상은 김종태를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더라. 십 몇 년 연극을 했는데도 그 부분이 적응이 안 됐다”고 덧붙였다.
연극에 관심 없던 중학생이었는데 우연히 받은 소극장 초대권으로 연극에 매료됐던 소년.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본 연극이 78편이나 됐다. 자연스럽게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연기자가 된 줄 알았는데, 독어독문과(숭실대)로 입학했고 연극반에서 시작했다. 자신도 신입생이면서도 얼마 간 연습해 신입생들에게 공연을 보여주는 한 사람이 된 특이한 경력도 있다.
“전 연극이 너무 좋아 연기를 시작했어요. 영화를 찍고 이렇게 인터뷰하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마음속에 재미가 자꾸 생겨야 연기를 하는 거예요. 재미가 없어지고 억지로 무대에 서야 하는 때가 오면 그만두려고 해요. 일흔, 여든 살까지 무대에 서면 땡큐한 인생을 사는 것이겠지만요.”
박원상은 “영화가 15세 관람가 등급이 나왔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며 “어린 친구들이 1980년대를 거친 선배들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캐치한다는 것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고통과 공포의 모습이 뭔지를 가슴으로 느끼고 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또 “고문에 대한 영화이지만 그래서 더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영화니,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더 없는 보람이 될 것 같다”며 “큰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인데 손 붙잡고 가서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주변에서는 아이에게 안 좋을 것 같다고 걱정을 하지만 꼭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가 보고 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싶거든요. 힘들어하면 힘들어하지 않도록 얘기해 줄 수도 있고, 얘기를 나누며 저도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친구라 대화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닌데 이 영화를 빌미로 이야기도 나누고 싶네요.”(웃음)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 사진 팽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