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없다’(1999), ‘주유소 습격사건’(1999), ‘신라의 달밤’(2001), ‘공공의 적2’(2005), ‘포화속으로’(2010)….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영화에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착실히 쌓아간 배우. 20여개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단역과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며 잠깐씩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꽤 비중이 높은 역할을 맡았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영화 ‘비정한 도시’(감독 김문흠)를 통해서다. 심야의 택시사고를 시작으로 연쇄 범죄가 이어지는 충격적 비극을 담은 영화에서 그는 단역 배우 출신의 불륜남을 연기한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죠. 대학생 때, 포창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진지한 고민을 했어요. 내가 한석규보다 연기를 잘 하냐, 아니면 장동건보다 잘 생겼냐, 그것도 아니면 집에 돈이 많은가를 놓고 생각을 했는데 결론은 전 아무것도 포함이 안 되더라고요. 직접 발로 뛰어 다녀야하는 것 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 받은 조그만 상들과 경력을 쓰면서 각 영화 제작사를 기웃거렸다. 200여개가 넘는 제작사에 전화를 돌리고 영화 진행 상황에 대해 살폈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리 쉬울까. 당연히 많은 곳에서 거절당했다. 데뷔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태양은 없다’를 만난 건 좋은 징조였다.
“지원을 하고 2달이 지나서야 오디션 보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감독님, PD님, 차승재 대표님 등 많은 분들이 계셨었어요. 제가 오산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학교 이름을 보시고 김성수 감독님이 ‘너 몇 회야?’, ‘호랑이 선생, ‘빨래판 잘 있냐?’라고 물어보시며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같은 학교 출신인 줄 아신 거죠. 정신이 없어서 ‘잘 계시다’고는 했는데 집에 오면서 생각해보니 그런 선생님이 안 계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감독님은 서울 오산고, 저는 경기도 오산의 오산고였죠. 이제껏 얘기 안 해서 감독님도 모르실텐데 괜찮겠죠?”(웃음)
그리고 또 한 번 찾아온 교통사고.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꿈 많았던 29살 청춘. 평생 걷지 못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였지만, 가족과 영화에 대한 열정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재활훈련을 열심히 받고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건강은 찾았지만 영화계에 복귀하긴 쉽지 않았다. 다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귀신이 산다’(2004)로 또 한 번 운 좋게 복귀할 수 있었다. 이어 ‘투사부일체’(2005), ‘가문의 영광2’(2005) 등에도 출연 기회를 얻었다. “제가 운이 좋은가 봐요. 주위에서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배우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두 번의 교통사고가 원망스럽진 않을까.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에서 그와 함께 주목받았던 유해진과 이종혁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사가 됐다. “같이 나왔던 사람들이 잘 된 걸 보면 부럽기는 하죠. 하지만 교통사고를 낸 건 제 잘못이었거든요. 운을 잘 받아치고 나가야 했는데 제 불찰이었던 거죠. 누구를 탓하겠어요.”
김태환은 태권도를 잘해서 운동선수로 촉망받았지만 고등학교 때 생긴 연극반에 매료돼 운동을 그만뒀다. 그렇게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학과를 거쳐 상명대 영화학과, 중앙대 예술대학원 공연영상학과를 졸업했다. 연기가 너무 잘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할지 몰랐던 시절, 답을 구하는 제자에 ‘애들을 가르쳐보라’는 지도교수의 말을 듣고 강의를 나가게 됐다. 벌써 4년 가량이 됐단다.
“대학에서 후배들에게 강의도 하지만, 제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요.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친구에게 ‘너는 연기를 꿈꾸며 어떤 식으로 미쳐봤니?’라고 묻곤 하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말해줘요.”
“전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어린 시절 꿈을 이뤘어요. 그 꿈 때문에 힘들었고, 고통도 받았지만 그 꿈이 있어서 고난을 잊을 수 있었고, 또 희망이 생겼죠. 2013년에 얼마나 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진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 사진 팽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