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MBC 드라마 ‘아랑사또전’(극본 정윤정/연출 김상호)을 마친 배우 한정수(40)는 진한 아쉬움을 보였다.
‘아랑사또전’은 기억실조증에 걸린 처녀귀신과 귀신 보는 능력을 지닌 사또가 펼쳐낸 흥미진진한 판타지 활극으로 방송 전부터 기대를 모았었다. 한정수 역시 처음 시놉시스를 받았을 때부터 기대가 컸다고 했다.
“5개월 찍으면서 큰 소리 한 번 안 났어요. 최고의 스탭, 최고의 배우들이었죠. 충분히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는데.” 스스로 ‘슬로우 스타터’라 칭한 그는 쫓기듯 진행된 작업에 대한 아쉬움을 잔뜩 내비쳤지만 인터뷰 내내 ‘아랑사또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극중 한정수는 구천을 떠도는 혼령을 쫓는 저승사자, ‘추귀’ 무영 역을 열연했다. “무영에겐 감정이 있으면 안 됐죠.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게 힘들었어요. 그 안에 갇혀 못 움직이니 중반까지는 힘들었는데, 이후 역할과 가까워지면서 극복했습니다.”
초반부터 화제를 모았던 저승사자 분장에 대해 묻자 낮 촬영의 고충을 털어놨다. “밤에는 괜찮은데 낮에는 참 이상하더라고요. 저 혼자 하얗게 떠 있다 보니(웃음).” 묻지 않아도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두꺼운 분장에도 불구, 그는 “워낙 잡초같이 자라 피부 트러블은 없었다”며 씩 웃었다.
핏기 없는 낯빛에 무표정. 존재감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말이 필요 없는 캐릭터라 하자 한정수는 “그게 제일 중요했다. 무영은 존재감 하나였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무영 역시 전생 그리고 이전 생에는 연인과 애틋한 사랑을 나눈 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영과 무연이 사연이 있는 남매라는 설정으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단순히 남매로만 한다면 그런 감정이 나올 수 없었겠죠. 감독님과 논의 끝에 전생에 사랑하는 사이였던, 아직 그 사랑이 남아있는 남매로 가게 됐죠.”
다수의 필모그래피를 지닌 한정수지만 멜로 연기는 의외로 처음. 하지만 ‘쪽대본’이 함정(!)이었다. 무연과의 멜로에 대해 묻자 “어색했다”며 머쓱해했다.
“난감했죠. 멜로를 해본 적도 없는데다 대본이 늦게 나왔거든요. 전날까지만 해도 홍련과 원수였는데 다음날 보니 갑자기 둘이 연애를 하니까. 행복한 한 때의 모습을 연기하는데,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혼났죠.”
우여곡절 끝에 무영은 제 손으로 무연을 없애고 연기처럼 소멸됐다. 하지만 에필로그 씬에서 그는 환생했다. 뜻밖에도 옥황상제(유승호)의 총애를 받는 천상의 염소로. 그는 “흑염소는 아니었다”며 허허 웃었다.
한정수는 미대에 진학했지만 이후 경제학을 전공했고, 우연한 계기로 연기의 매력에 흠뻑 빠진 뒤 늦깎이 99학번으로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원래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해보니까 다르더군요(웃음). 재능이 있어야 되는 분야라는 걸 느낀 뒤 결국 포기했죠.”
연기자의 길에 접어들게 된 계기는 뜻밖에도 같이 음악하던 친구의 ‘아르바이트’ 권유였다. “음반 활동 끝내고 방황하고 있을 때였죠. 97년이었나. 한창 고민이 많던 시기였는데, 대학 시절 음악할 때, 밴드에서 드럼을 치던 친구가 어느 날 연락이 와서 대학로 극단 아르바이트를 권유했어요.”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지 않는가. 다양한 극단 업무를 도우며 연극을 접하다 보니 “인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했다. 이후 극단을 나온 한정수는 직접 연기자로서 도전장을 냈다.
“‘추노’ 이후로 조금씩 알아봐주기 시작하셨으니 10년 좀 넘게 걸린 거 같아요.” 2006년 ‘마왕’을 시작으로 ‘한성별곡 정’, ‘왕과 나’, ‘바람의 화원’, ‘추노’, ‘검사 프린세스’, ‘근초고왕’, ‘포세이돈’에 이어 ‘아랑사또전’까지. 어느새 그는 ‘미친 존재감’으로 브라운관을 채우고 있다.
주로 ‘정의’의 편에 서 온 한정수에게 악랄한 악역으로의 변신을 권유하자 눈을 반짝인다.
“영화 ‘해바라기’에서 (김)정태와 악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참 신기한 게, 악랄한 역할이었는데 악랄한 게 안 되더라고요. 나름 악랄하게 한다 했는데, 정태는 진짜 악역이 됐고 전 ‘어리버리’가 됐더군요(웃음). 그 땐 독하게 못 했는데 지금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리바리한 인물 말고 진짜 악역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일 하고 싶은 건 코미디란다. “지금까지 대부분 무거운 역할을 해왔는데, 사실은 코미디나 시트콤. 가볍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어요.”
언젠가 브라운관 또는 스크린에서 ‘리얼’ 한정수를 만나게 될 상상을 하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진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 팽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