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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나 책에서만 보던 그가 나타났을 때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그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지만, 인자한 얼굴에 강인한 모습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섰던 인물.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그 혼자 이뤄낸 건 아니지만 정치계에서 손에 꼽히는 거목이다.
이후 김근태라는 이름을 접한 건 뉴스를 통해서였다. 지난해 12월 그는 사망했다. 고문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등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죽음이 충격적이지만 내 일, 내 주변의 일이 아니라면 늘 그렇듯 시간이 흘러 김 전 상임고문의 일도 어느새 잊게 됐다. 그러다 다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통해 사법부를 보기 좋게 비판한 정지영 감독이 차기작으로 김 전 상임고문의 이야기를 담은 ‘남영동1985’를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했다.
민주화를 위해 애쓴 김 상임고문의 노력이 초점이 아니라, 그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했던 고문이 중심인 영화.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자격으로 붙잡혀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에서 22일 동안 고문당한 실화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부인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이 영화에 도움을 줬는데 그 용기가 존경스럽다.
정 감독이 또 한 번 던지는 ‘돌직구’ 영화는 너무나 적나라해 가슴에 와 꽂힌다. 무엇을 생각했던 더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내내 불편하다. 잔인한 고문의 기록들이라는 부제를 달아야 하지 않을까. 관객들도 함께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다.
극중 고문 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은 김종태(박원상)의 코와 입 속에 물을 뿌려 기절을 시킨다.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와 입속에 넣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숨을 쉴 수가 없다. 물을 뿌린 몸에 전기를 가해 온몸이 타는 것 같은 장면은 소름이 끼친다. 담요를 덮어 몽둥이질을 하는 건 차라리 덜 아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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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원상을 당분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 전 고문이 당한 시대적, 신체적 아픔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전라노출까지 한 열연이다. 잔인무도한 고문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벌이는 이경영은 무시무시한 존재다.
‘남영동1985’는 지난 6일 오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 처음 공개돼 관객들을 울리고 감동시켰으며, 또 한 편으로 분노케 했다. 이 영화가 일반 극장에서 개봉할 때 ‘다시 스크린을 통해 봐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 정도로 참혹했다.
정 감독은 “이 영화가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의 나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대선 후보들이 모두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직 배급사와 개봉일은 잡지 못했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현철 기자 jeigu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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