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후의 중간쯤에서 선택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감독)는 이병헌에게 첫 사극이다. ‘광해’는 조선 광해군 8년, 독살 위기에 놓인 왕 광해를 대신해 천민 하선이 왕의 대역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팩션 영화다.
이 영화를 향한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뜨겁다. 개봉 첫날 17만명을 동원하며 흥행 청신호를 밝혔고, 4일 만에 1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 입소문도 좋아 “‘도둑들’에 이은 천만 영화가 또 나올 것 같다”는 얘기도 들린다.
최근 삼청동의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분위기가 좋으니 은근 욕심이 생기더라. ‘놈놈놈’ 흥행(668만)을 넘어서는 게 아닐까 기대는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휴, 천만이란 게 현실 가능한 숫자인가? 5분의 1이 봤다는 건데, 어마어마한 기록이다”고 했다. 그리곤 “흥행은 보상같은 선물이지 전부가 아니다”며 명작 ‘시네마 천국’ 얘기를 꺼냈다.
“오랜 기간 마니아가 있고 회자되는 영화가 좋아요. 제 출연작 중 ‘번지점프를 하다’나 ‘달콤한 인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인 것처럼요. 제게 영향력을 끼쳤던 영화는 어릴 때 본 작품들인데, 제 인생에, 심지어 인성에까지 영향을 미친 영화들요. 그게 바로 ‘시네마 천국’이었죠. 제가 찍은 영화 한편이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최고 지점이지 않을까 싶네요.”
왕인 ‘광해’와 천민 ‘하선’을 오가는 1인 2역의 연기는 스크린을 꽉 채우며 관객들을 쥐락펴락한다. 4역이나 다를 바 없는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는 듯 하다. 독단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광해를 연기할 땐 날카롭고 예민한 눈빛을, 재치 넘치는 천민 만담꾼 하선을 연기할 땐 뜻밖의 발랄함으로 깨알웃음을 선사한다.
이병헌은 “옷(용포) 입는 방법부터 낯설었지만,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촬영장에서 거울을 봤는데 그런대로 어울리더라. 코미디를 하는 건 좋다. 웃기는 건 자신 있다”며 씨익 웃는다.
두 달여간의 고민 끝에 선택한 작품. 제작사 대표와 감독이 미국으로 날아와 설득할 때도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시나리오는 만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는 있었지만, 실사로 표현하는 건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출연한 건 아니에요. 장르가 선택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죠. 읽으면 읽을수록 배역에 빠져들고 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사실 그 장면을 찍고 손발이 오그라들어 쳐다보질 못했어요.(웃음) 감독님도 그랬던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자고 하시는데 감독님의 ‘한 번만 더’ 집요함은 말할 수가 없어요. 김지운 감독은 그에 비하면 양반이죠. 하하! 그래도 ‘하선’을 연기하면서 한바탕 신나게 논 것 같은 기분이었죠.”
줄곧 20여년을 톱스타로 살아온 이병헌. 한류스타와 인기배우라는 양날개를 달고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다. “만약 둘 중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면 스타라는 부분이다”던 그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열광적으로 이유없이 좋아해주신다. 축복이다”고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후배들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연기다. 그 밖으로 넘어가면 꼬랑지를 내린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인생의 격변기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적에 많은 빚을 지셨는데, 집도 전세였죠. 그런 상황에 부닺히니 경제적인 것만이라도 신경쓰지 않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더라고요. 그땐 안해본 거 없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사인회도 했어요.”
어느덧 마흔을 넘긴 그에게 옅은 주름도 보였다. 배우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매력적인 일일 수도 있다. 이병헌 역시 “노안이 되는 건 상관 없다. 나이를 먹으면서 깊이가 느껴진다는 말도 좋지만, 여전히 개구진 모습이 있다는 말이 좋다”고 말하며 소년처럼 웃었다.
영화 개봉도 못 보고 ‘레드2’를 찍기 위해 캐나다로 출국한 이병헌은 브루스 윌리스, 존 말코비치 등과 함께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는 최근의 할리우드 활동에 대해 “또 한수 배우려고 간다. 그쪽만의 정서와 문화를 이겨낼 순 없다. 분명한 점은 이것이 내 최종 지점은 아닐 것이다”고 했다.
해외에 오래 머물다 보면 연인(이민정)과의 열애엔 차질이 없는 걸까. 결혼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병헌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살고 싶다”는 답으로 대신했다.
“배우 이병헌과 인간 이병헌이 동떨어져 있다는 걸 요즘 더욱 느껴요. 저는 보수적인 면이 많고 평범함을 지향하는 사람이거든요.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적도 없고, 가족의 울타리, 아들로서의 도리, 가정 안에서 지켜줘야 할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죠. 결혼하면 가정적일 거라는 믿음이 스스로 있어요.”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향희 기자 happy@mk.co.kr/사진=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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