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뱃길로 1시간 남짓 들어서면 남해의 숱한 섬들 속에서 용초도를 만날 수 있다. 용초도는 용을 닮은 바위와 나무보다 풀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곳은 하루에 오가는 배편도 오전과 오후 두 번뿐이다. 100여 명 남짓한 용초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로 밭에 나가 농사를 짓거나 개펄에서 조개를 잡으며 소박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섬마을 어르신들은 의외로 유쾌했다. 마늘을 다듬다 장난기가 발동해 콧구멍에 집어넣는 할머니, 제작진의 찢어진 청바지를 보고는 꿰매주겠다며 바늘과 실을 찾는 할아버지, 눈썹을 태워버린 할아버지 얼굴에 직접 숯으로 눈썹을 그려주는 할머니 등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섬마을의 일상 뒤에는 남모를 아픔이 숨어있다. 주민들은 1959년 태풍 ‘사라호’를 비롯해 2003년 매미 태풍으로 집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용초도의 아픔은 이뿐만이 아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은 섬에서 강제로 쫓겨났었다. 전쟁이 끝나고 주민들이 다시 돌아온 고향은 허허벌판이었다.
거센 태풍이 한 번씩 휩쓸고 갈 때마다 사람들도 용초도를 떠났다. 열 집 중 두 집은 빈 집으로 남았다. 그 중 정옥순 할머니는 1년에 몇 번 만나기 힘든 자식들을 매주 번갈아가며 만난다. 치매가 시작돼 점차 일상이 힘겨워지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8남매는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어머니 곁을 지키기로 했다.
용초도 주민들의 아침은 4시 반
인생의 숱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방패삼아 자식을 길러온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 용초도에서 황혼을 보내고 있었다.
[mksports@mkinternet.com]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