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 카페엔 박해일도, ‘은교’의 노시인 ‘이적요’도 없었다. ‘제3의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파릇파릇 자라난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한바탕 산고를 치른 후라 그런지 한결 여유로워보였다. 웃음소리도 한톤 높아졌고, 설명도 디테일 했다. 낯가림 심하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7년째 쓰던 낡은 핸드폰도 신형으로 바뀌었다.
“어딘지 좀 달라 보인다”고 하자 박해일은 “아직도 일흔 노인의 기운이 남아있어 그런 것 같다”며 조용히 웃었다.
“작품이 끝나고 나면 ‘앓이’라고 하죠. 확 뒤집어지는 게 있는데 다 털어내지 못하고 유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노인의 기운은 다른 말로 하자면 연륜인데, 느림의 미학이란 게 있잖아요. 예전엔 불안하고 긴장된 기운이 많았다면, 이제는 이런 홍보 인터뷰도 속도조절이 되는 것 같고.”
지난해 청룡영화제에서 박해일은 “기막힌 작품으로 돌아오겠다”는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 ‘기막힌’ 작품이 바로 ‘은교’였다. 박해일은 그때 얘길 꺼내자 “내가 왜 그렇게 말했지?” 하며 머쓱해했다. ‘은교’는 그에게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기막힌’ 작품일 듯하다.
30대 배우가 일흔 노인을 연기한 것도 ‘파격’이지만, 성기와 음모 노출 등 거리낌 없는 표현도 놀라움을 안겨준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출발했다. 시사회 후 쏟아진 반응도 극과 극이다. “소설보다 못하다”와 “토 달 수 없을 만큼 잘 만들었다”. 하지만 박해일의 명민한 연기는 이런 평단의 호불호조차 무색케 한다.
이번 영화는 10년 경력 배우 박해일에게도 엄청난 ‘모험’과 ‘도전’이었다. ‘변신’의 문제를 넘어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하니, 그것이 ‘은교’를 선택한 결정적 지점이기도 했다.
“다시 하라면 엄두가 안 날 작품이지만, 이번 영화는 200%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영화라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수공품이죠. 그만큼 힘들었고, 부담스러웠고, 고민 됐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성취감이 커요.”
박해일은 ‘은교’에서 두 가지 사고(?)를 동시에 쳤다. 삭발과 성기노출을 동시에 감행한 것. 여기에 8시간의 고행 같던 특수분장을 견뎌냈다. 감독은 “박해일의 인내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영화”라고까지 표현했다. 얼마나 독한 특수분장이었던지 꼬박 24시간을 쉬어야만 했단다.
특수분장까지 훌륭하게 나왔건만, 고민은 그때부터였다. 막상 일흔 노인을 표현하려다보니 딜레마에 빠지게 되더라는 것. 그 중에서도 노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가장 큰 고충이었다. 감독의 도움도, 기계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탑골공원에 가서 수많은 노인도 만나보고, 시나리오 보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기도 했죠. 그런데 가장 큰 고민은 감정 표현이더라고요. 촬영을 하고보니 물리적인 표현보다 감정이 더 중요한 부분이란 걸 절감하게 됐죠. 쉽게 풀리지 않을 땐 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많은 얘길 나눴던 것 같아요.”
“감독님은 상상 장면에 나오는 청년의 모습과 노시인의 현재 모습을 같은 배우가 했으면 하셨대요. 실제 70대 배우가 연기하지 않았다는 점,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박해일이란 배우가 노인 역을 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일 겁니다.”
영화 속 파격 정사신은 여러모로 화제다. 박해일도 김고은과 화끈한 베드신을 펼쳤다. 극중 끓어오르는 ‘젊음’을 상징하듯 전라로 정사신을 펼쳤다. ‘19금’과 ‘베드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박해일은 “좋은 쪽으로 놀라면 다행이다”며 담담해 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김고은은 ‘꽃잎’의 이정현, ‘올드보이’의 윤진서를 떠올리게 한다. 박해일은 김고은에 대해 “적응력도 좋지만 대담한 구석도 있더라”고 칭찬했다.
“베드신이란 게 길어질수록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요. 짧고 굵게 촬영을 끝냈어요. (김고은) 막연하게 떠올린 원작 속 은교의 이미지와도 비슷했지만, 호기심도 강한 배우였어요.”
연극에서 영화로 무대를 옮긴 이후 승승장구다. ‘살인의 추억’ ‘괴물’ ‘최종병기 활’ 이 세 작품만으로 2000만명을 넘어섰다. 혹자는 박해일이 다른 흥행 톱배우들과 다른 점은 ‘연기도 되고 외모도 되는 배우’라고 한다. 박해일은 이 말에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제 외모가 걸림돌이 되진 않지만 그렇다고 장점도 아니죠. 배우는 매력적인 연기를 할 때 가장 잘 생겨 보이지 않나요? 작품 속에서 가장 빛날 수 있다는 게 우리 일 같아요.”
40년 세월을 훌쩍 넘었다 돌아오니 지금의 젊음도 새삼 감사했다. “너희의 젊음이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 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는 백발노인 이적요의 가슴 뭉클했던 대사처럼.
“이번 영화가 늙음과 청춘의 한때를 얘기하잖아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죠. 저도 이 영화를 찍으면서 늙음을 상상해 봤는데,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나이 값 하네’란 소리 들을 때가 가장 기쁘긴 하지만요.(웃음)”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향희 기자 happy@mk.co.kr/사진=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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