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열광하는 K-팝은 비단 몇 명의 스타들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다. 적게는 수년 많게는 10년 이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연구와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그들이 전세계 무대에서 그토록 큰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빛나는 K-팝 스타들을 더욱 찬란한 만드는 우리 대중음악계의 진정한 킹메이커들을 만나보자.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 엑소(EXO)의 공통점은 모두 한 사람의 동작을 따라 배우며 무대에서 선보일 춤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는 SM에서 하나의 팀으로 결성돼 처음 안무를 맞추는 순간 만나게 되는 사람이고, 이들이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곁에서 미세한 동작 하나를 바로 잡아주는 사람이다. 그는 SM의 안무 디렉터 심재원(30)이다.
○ 실패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마지막 선택
심재원은 열다섯의 나이에 1998년 이글파이브의 멤버로 데뷔했고, 다시 2002년 블랙비트라는 팀을 통해 다시 한번 가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소위 아이돌 1세대다. 아직 이글파이브, 블랙비트라는 팀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실패한 아이돌 그룹’이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블랙비트만 하더라도 지금 기준에서 봐도 상당한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팀이었어요. 회사에서도 드림팀으로 불리며 엄청난 기대를 받고 데뷔 했죠. 모두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그만큼의 지원을 받은 팀이 어이 없이 시장에서 참패하니 회사에서도 어찌 손을 써야 할 지 몰랐던 것 같아요. 결국 팀 자체가 공중에 붕 떠버리게 된 거죠. 돌이켜 생각하면 블랙비트의 퍼포먼스를 따라주는 음악이 당시만 해도 나오기 어려웠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실제로 당시 영상들을 보면 블랙비트는 멤버 모두가 살벌 하리 만치 강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여기에 상당한 수준의 가창력을 요구하는 곡을 거침없이 소화해내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무려 7년 동안 블랙비트 2집을 준비했어요. 동방신기가 부른 ‘라이징선’을 타이틀곡으로 하려고 녹음도 했고, ‘오정반합’(O-正.反.合.)도 우리가 부를 뻔 했던 곡이죠. 슈퍼주니어가 부른 ‘갈증’도 마찬가지고요.”
모두 소위 대박이 났던 히트곡이다. 씁쓸하지만 실제로 ‘비운의 그룹’이라는 수식어가 블랙비트 만큼 잘 어울리는 팀을 국내 가요계에서 또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어쩌면 후배들의 성공이 그에게 열등감이나 패배의식을 심어줬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이니 당연히 힘들어할 수 밖에 없죠. 그런데 그들에게는 힘들다는 얘기를 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군요. 소녀시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회사에 얘기를 했죠. 내가 한번 가르쳐 볼 수 있겠냐고.”
간간히 회사에서 후배들의 안무 연습에 도움을 주던 선배 심재원이 본격적으로 이들을 트레이닝 하고 안무를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 소녀시대가 쓰러질 때 마다…
실제로 SM의 연습강도와 트레이닝 시스템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군무가 완벽하게 맞을 때 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SM에서 연습생 꼬리표를 떼고 데뷔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과 지독한 훈련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자부심이다. 실례로 소녀시대는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의 안무를 완성하는 데만 1년이 꼬박 걸렸다.
“그렇게 데뷔까지 한 친구들에게는 매 무대가 엄청난 압박의 반복이에요. 결국 무대에 서고 질타를 받는 사람도 본인들이니까요. 단 한번의 무대라도 연습한 만큼 기대한 만큼 잘 되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생기죠. 그토록 꿈꿔왔던 무대가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게 되는 거예요.”
데뷔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또 그 시작은 끝없는 좌절들의 연속이다. 특히 소녀시대 처럼 데뷔 후 한 순간도 쉼 없이 성장만 해온 팀에게는 새롭게 준비하는 한 곡 한 곡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심재원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애초 이 일을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지만, 저 역시 경험한 일이기 때문에 이 친구들이 느끼는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럴 때 마다 이야기 하죠. ‘너희는 특별한 애들이 아니다. 단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일을 하는 거다. 자부심을 느껴야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엄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날 때 너 자신으로 반드시 돌아와라. 지금 너희들이 소녀시대냐 인간 김태연, 김효연, 이순규, 황미영, 정수연, 임윤아, 최수영, 권유리, 서주현 이냐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이죠.”
심재원의 말이 단순히 소녀시대 태연과 인간 김태연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소녀시대로 대중들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제대로 하면 실제 자신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그 반대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라고, 보다 크리에이티브 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라고 강조해요. 음악도 좋고, 연기도 좋고, 춤도 좋아요. 젊으니까, 그만큼 에너지와 열정이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해주죠. 그게 그들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니까요.”
결국 어쩔 수 없이 분리시킬 수 밖에 없었던 두 개의 자아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소속사라고 할 지라도 스태프의 역할과 아티스트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스태프의 역할을 하면서 아티스트를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심재원의 존재가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레터맨쇼’에 소녀시대를 세워보니‥K-팝의 진짜 경쟁력
올해 1월 31일(현지시간) 소녀시대는 미국 지상파 채널인 CBS의 ‘데이비드 레터맨쇼(The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 출연했다. 이날은 미국 방송 역사상 최고의 토크쇼로 평가받는 ‘레터맨쇼’가 방송 30주년을 맞은 날이기도 했다. 진행자 데이비드 레터맨이 소녀시대를 호명하고, 백스테이지에서 자리를 박차고 무대를 향하는 소녀시대를 마지막까지 챙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심재원이었다.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떨리죠. 나중에 데이비드 레터맨이 묻더군요.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라고. 그 순간에 느꼈던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높게만 보였던 미국이라는 벽이 이제 어느 정도 가늠하고 넘을 수 있을 만큼의 눈높이로 내려온 걸 실감했죠.”
“그들은 저렇게 훈련이 됐으니까요.”
사실이다. K-팝 스타들을 그렇게 훈련이 됐다. 백인, 흑인들에 비해 신체적 조건이 불리하고 애초 음악이나 춤의 형태 역시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니 엄밀히 말해 오리지널이 아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한 것. 하지만 K-팝 가수들은 그만큼 ‘훈련’을 한다.
“해외의 경우 잘하는 아티스트를 뽑아서 프로듀싱해서 나가는 시스템이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훈련을 통해 만들어 간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여기에는 멤버들 뿐 아니라 스태프들이 모두 하나가 돼서 움직이는 거죠. 실제로 저는 소녀시대의 열 번째 멤버고, 동방신기의 여섯 번째 멤버고, 슈퍼주니어의 열 네번째 멤버라는 생각으로 함께 해요. 결국 노력한 시간에 결과물의 퀄리티가 비례하죠. 단순히 합을 맞춘다는 차원을 넘어 서로가 교감하는 수준까지 올라가면 세계에서 유일무의한 팀이 되는 거죠.”
소녀시대는 단순히 소녀시대가 아니라 심재원을 비롯해 SM의 스태프 300명이 포함된 일종의 시스템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현재 해외 팝 스타들이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완벽한 퍼포먼스와 가창이 결합된 무대가 완성된다. 실제로 고(故) 마이클 잭슨을 비롯해 세계적 최정상급 스타들은 이 같은 퍼포먼스와 가창의 완벽한 조화로 현재의 반열에 올랐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른바 포메이션이에요. 기본적으로 퍼포먼스와 가창이 결합된 무대는 해외의 경우 대부분 솔로 아티스트들이죠. 하지만 우리는 여러 명이 같이 고난의도의 퍼포먼스를 기승전결까지 가미해 보여준다는 거죠. 외국인들이 볼 때 여러 명으로 이뤄진 팀이 완벽하게 하나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 일 거예요.”
아무리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가창이 가미된 노래의 경우 언어의 장벽이란 것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몸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해외 팬들이 우리 K-팝 가수들의 춤을 따라 추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자체적으로 커버 댄스 페스티벌까지 여는 것은 이같은 퍼포먼스의 힘이다.
○ 심재원의 새로운 도전
심재원은 비트버거라는 이름으로 오는 5월 말 2012월드디제이페스티벌(이하 월디페)에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비트버거는 심재원과 같은 블랙비트의 멤버였던 황상훈으로 구성된 2인조 디제잉팀이다. 아직 경력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클럽 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실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글로벌 개더링 등 유수의 음악 축제에 초청을 받았다.
“뭘 하든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게 제가 지금까지 이 직업을 통해 배운 것들이에요. 사실 아직은 일천하죠. 근데 정말 재미있어요. 며칠 밤을 새고 안무작업을 해도 내 음악 작업을 할 때는 또 다른 기운이 생기니까요. 여기에 단순히 3~4분을 하고 무대를 내려오는게 아니라 한 시간 가량을 내 음악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건 분명 또 다른 경험이고요.”
비트버거는 단순히 일렉트로닉 음악이 아니라 밴드 사운드가 결합된 소위 라이브 셋에 댄서, 래퍼까지 가미한 새로운 형식의 퍼포먼스형 디제잉 팀이다. 올해 월디페의 경우도 스키조의 기타리스트 주성민과 트랙스의 기타리스트 정모, MC MQ(현민규)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
“무대에 대한, 내 음악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심했어요. 음악 속에 있는 게 가장 즐거워요. 제가 행복한 시간입니다. 또 우리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해요. 우리의 삶은 이렇게 무궁무진하다는 걸.”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현우 기자 nobodyi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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