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유럽 여행길에서 막 돌아왔다는 이기원(42) 작가. 파란만장했던 40여일간의 여행기는 트위터를 통해 그의 팬들에게 생중계 됐다.
‘제중원’을 끝내고 휴식기를 갖고 있는 그는, 섭씨 30도를 웃도는 요즘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그가 읽는 책은 한홍구 교수의 ‘특강’. 열정만큼 독서량이 따라주지는 못하지만, 온라인 책 쇼핑몰 ‘알라딘’의 플래티넘 회원이라는 자랑도 곁들였다.
홍대 상상마당 6층 카페에서 만난 이기원 작가는 시원스러운 파란색 남방을 입고 있었다. 후덕해보이는 그의 동그란 얼굴과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제중원’을 쓰면서 15kg이 더 불었다는 그는, 요즘 트레이너와 함께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선지 인터뷰 후 이어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는 삼겹살이 아닌 ‘냉면’을 메뉴로 선택했다. 산고의 고통 끝에 얻은 달콤한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제중원’ 끝나고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 이번에 산티아고를 다녀왔는데 좋았어요. 앞으로는 드라마가 끝나면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무언가를 하려고요. 단순히 휴양지 가서 노는 것이 아니고요. 어제 김태훈(방송인)씨를 만나 재미있는 얘기를 나눴어요. 태훈이가 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냐고 물었더니, ‘다카르 랠리’라는 것이 있대요. 사막을 통과해 파리에서 세네갈 다카르까지 가는 거에요. 보름정도 기간이 걸리는데 ‘죽음의 랠리’라고 불려요. 한 명은 운전을 하고, 한 명은 GPS를 이용해 길을 찾는 거죠. 가다가 어떤 사람들은 죽기도 한대요.
-죽기도 한다고요?
▶ 네, 그런데 치한 문제로 인해 작년부터는 남미에서 열렸어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부터 칠레까지 가는 겁니다. 이번에도 한 명 죽었다고 들었어요. 태훈이 말로는 그 랠리를 하자고 하더군요. 갑자기 제 마음 속에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라고요. 여행 다녀온 이후로는 요즘 한홍구 선생의 ‘특강’을 읽고 있어요. 한국 현대사 이야기인데, 재미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독서가 드라마를 구상하거나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죠?
▶ 책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들어있어요. 그런 것들이 드라마를 쓰는데 밑거름이 되요. 장르에 관련된 책을 읽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제중원’을 한다고 했으면, 그와 연관된 여러 책을 읽어요. 공부를 하기 위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는 없어요. 진정한 책의 재미를 못 느껴요. 책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분야를 읽어야 해요. 평전 같은 것을 좋아해요. 마일스 데이비스의 평전 같은 거요.
-한 달에 독서량은 어떻게 되나요?
▶ 드라마 도중에는 읽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책을 구매할 수 있는 곳에 들어가서 새로 나온 책을 보관함에 담아요. 이거 읽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웃음) 금방 없어지는 책들은 미리 사놔요. 드라마 끝나면 읽으려고요. 최근에도 책 10권 정도를 샀는데, 지금도 읽고 있어요.
- 살이 더 찐 것 같아요.
▶ ‘제중원’ 쓰면서 15kg이 늘었어요.(웃음) 대본 쓸 때 기본적으로 10시간 이상은 앉아 있어야 해요. 운동부족이죠. 나갈 시간이 없으니까. 어머니가 일주일에 두 번 와서 밥을 해주시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폭식을 하게 되요. 운동을 열심히 했던 시절에는 몸무게가 75kg이었는데, 지금은 90kg이나 나가요.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해지더라고요. 슬슬 무릎에도 무리가 오고. (웃음)
- 그래도 드라마를 쓸 때는 잘 먹어야 하지 않나요?
▶ 말처럼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게을러지고 나중에는 잘 안되더라고요. 아는 몇몇 작가 분들은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황 청심원보다 더 효력이 높은 공진단을 먹거나 침을 맞더라고요.(웃음) 또 어깨에 마비가 와서 어떤 분들은 지압을 받기도 해요. 보통 후반부에 들어가면 하루에 18시간이나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깨와 허리에 엄청난 무리가 와요. 저도 허리가 아파서 트레이너를 불러 운동도 해봤어요.
- 보통 드라마 한 편 들어가면, 몇 개월 정도 작업을 하나요?
▶10개월 정도 걸려요. 사람도 못 만나요. 김수현 선생님의 트위터를 보니까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빼면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남는 건가라고 하셨더군요. 많이 공감했어요.
-대한민국에서 드라마 작가로서 산다는 건, 어떤 일인가요?
▶ 드라마 쓸 땐 뭐랄까 꼭 감옥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분명 짜릿한 행복감이 있다는 거죠. 특히 드라마 작가는 여자 작가가 대부분이에요. 남자 작가라면 뭘 할까 이런 고민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해요. 여자 작가나 주부 작가는 주변 삶 자체가 취재 대상이지만, 남자 작가가 그 세계를 잘 알고 쓴다는 것 자체는 힘들어요. 드라마라는 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니까요. (드라마는) 20~30대 여성 시청자들을 주타켓으로 많이 해요. 그들의 시선을 잡으려면 어떤 걸 해야 하나 고민이 있어야 하죠.
-그래서(남자 작가라서) 희소성도 있지 않나요?
▶ ‘제중원’은 그런 부분에서 미흡했죠. 20~30대 시청자들을 놓친 것에 폐착이 있었다고 봐요. 드라마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특정 다수 상대로 하는 것인데, 20~30대를 주 타깃으로 그들의 시선을 잡으려면… 어떤 걸 해야 하나 고민해야 해요.
-그래도 여자 작가들이 쉽게 쓸 수 없는 선 굵은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 제가 (여자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들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남들이 쉽게 접근하는 흔한 것에는 흥미를 못 느껴요. 본의 아니게 의학과 관련된 드라마를 두 편 했는데, 이 쪽으로 더 파 볼까 싶기도 해요.(웃음)
- ‘제중원’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 2년 걸렸어요. 백정이 의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커다란 임팩트를 받았죠. 작가는 남들이 할 수 없는 걸 드라마로 꾸며야 한다는 도전정신이 있어야 해요. 어찌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죠. 가령 수혈을 하는데 사람과 사람이 피를 주지 않습니까. 형사 드라마나 간첩 드라마를 보면 피를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불가능하다고 했었어요. 동맥에서 피를 주는데 드라마에서는 정맥으로 줘요. 불가능한 장면인데 2층 침대에서 주면 되겠다고 생각해냈죠. 기숙사 방에 2층 침대를 놓고 수혈 장면을 촬영했어요.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즐겼죠. 그리고 어디에서도 수혈했던 기록은 없지만, 당시 의학 역사 서적에서는 이미 수혈을 했었어요. 이런 것들을 드라마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즐거워요. 작가로서 행복한 창작, 행복한 고민이죠.
- 역사 드라마는 고증이나 출처 부분에 대한 논란도 생기잖아요. 그래서 더 섬세해야 할 것 같은데요.
▶ 자문해주시는 분과 의견 충돌도 있지만, 사실에 집착하기 보다는 개연성에 집착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하면 된다고 봐요.
- 첫방송 땐 정말 조마조마 했겠어요.
▶ 첫방을 하면 다음 날 시청률이 나올 때까지 잠이 안 와요. 시청자 게시판 보고, 잘 나와야 하는데 걱정이죠. 방송은 결국 시청률이 말해요.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는 드라마 작가는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초조해 하거든요.
-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와야 만족할 것 같나요?
▶ 단 자리 즉 10% 미만이면 불만이죠. 20%면 행복, 30% 이상이면? 정말 좋은 거죠. 그게 지표가 되는 건 억울하기도 하지만 표본조사니까. 시청률이 높으려면 운도 신드롬도 따라야 되고 노력 역시 필요하다고 봐요.
- 내가 쓴 작품에 배우들의 연기가 거슬릴 때는 없나요?
▶ ‘내 복이다’고 생각해요. 결국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고, 다들 프로에요.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연기를 함부로 평가할 순 없다고 봐요. 난 이쪽 일을 하면서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져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를 뽑아났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해요. 어떻게 해서든 작품을 만들어 내야하죠. 배우를 위해 대사를 쉽게 쓴다던가, 쉬운 연기로 고쳐주든지… 내가 힘을 가졌다고 해서 피해를 주면 안돼요. 내가 받았던 피해를 내가 권력을 가졌다고 돌려주면 안 됩니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가 아니라, 인연과 인연이 만나 좋은 점을 찾아가면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방송국 고위층 생각과는 전혀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내가 일하면서 즐거워야 하는 것이 중요해요. 최고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최선의 결과도 중요하죠. 드라마를 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제중원’에서 박용우, 한혜진, 연정훈씨의 연기는 어떻게 보셨나요?
▶ 너무 잘해줬어요. 최상의 캐스팅이었고, 배우들에게 너무 고마워요. 저는 배우 복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중원’은 특히 저에게 의미있는 작품이에요. 그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 일을 평생 해야 하나 고민도 많았는데. 이 드라마를 쓰면서 평생 작가로 살고 싶어졌으니까요.
- 대본을 쓰면서 버릇은 없나요?
▶ 금연은 한지 15년 됐죠. 끊은지 2년까지는 생각났는데, 그 다음부터는 생각 안 났어요. 담배를 피던 순간의 공허감을 메우는 게 중요한데, 어떤 사람들은 사탕으로 채우기도 한다지만 저는 기타를 쳤어요.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술을 마시면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죠.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알콜 홀릭’은 아니에요.
- 그렇게 힘든 작업 과정 중에도 절제력이 대단한 것 같네요.
▶ 전자오락도 안 해요. 작가들 중 컴퓨터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어느 순간 그 게임을 하고 있더군요. 예전에 지뢰찾기 게임을 3일 밤 한 적이 있었는데, 오락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느꼈죠.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 등 빠져있는 작가들이 많은데, 작가는 오락을 하면 폐인이 되겠다 싶었습니다.(웃음) 작가는 어떻게 보면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이 구분이 잘 안 되는 직업이에요. 책상에 앉아서 인터넷을 켜면 인터넷이 도움도 되지만, 서핑하고 하다보면 시간이 그냥 가버려요. 책상에 앉으며 글을 써야 하는데 허비하는 시간이 생기기 때문에 인터넷도 되도록 안해요. 책상에 앉으면 글을 쓰는 데만 몰두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양의 글을 쓸 수가 없어요.
- 다른 작가의 드라마는 잘 보는 편인가요?
▶ 볼 시간이 없어요. 그 시간에 책을 읽는 편입니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 한편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돼요. 많은 정보와 생각, 사유를 담고 있어요. 물론, 어떤 분들은 불안한 마음에 다른 작품들을 많이 보신다고 들었어요. 저같은 경우엔 제가 추구하는 세계관과 틀려서 잘 안 봤어요.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봐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대중들이 열광하는 화제작 같은 건 1,2부 정도는 봐요.
-재미있게 보신 작품들은 있나요?
▶‘청춘의 덫’, ‘모래시계’, 그리고 ‘내 인생의 콩깍지’요.
- 모두 옛날 건데요.(웃음)
▶지금 말한 건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요.
-그 이후로는 없나요?
▶그 이외에는 ‘미드’를 자주 봤어요. ‘웨스트 윙’이나 ‘소프라노스’, ‘ER’ 같은 것들이요.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는 누구신가요?
▶ 김운경 선생님이요. 꼭 써주세요.(웃음)
- ‘서울의 달’ 쓰신 분이요?
▶ 네, ‘파랑새는 있다’(1997년작)도 좋아해요. 그 드라마 인상 깊게 봤어요. 변두리 인생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서울의 달’, ‘옥이이모’, ‘황금사과’, ‘돌아온 뚝배기’. 너무너무 사랑해요.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많이 다루잖아요. 그리고 김수현 선생님도 좋아해요. 필력도 좋으시지만, 그 분은 드라마 천재이신 것 같아요.
-친분은 있으신가요?
▶ 없어요.
-트위터에 가서 친해져 보시는 것이 어떤가요?
▶그런 건 좀 쪽팔려서요.(웃음)
-김수현 작가님이 ‘제중원’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는데, 좀 친해질려고 노력하시지 그랬어요?
▶ 트위터 팔로우는 하고 있어요. 김수현 작가님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추신 분 같아요. 어떤 작가를 보면, 매번 똑같은 작품을 쓰거든요. 신데렐라 이야기면 계속 신데렐라 얘기, 미녀와 야수면 계속 미녀와 야수. 드라마의 기본을 알고 통찰력을 갖춰 핵심이 무엇인지 알면 드라마를 잘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빠지면 다른 걸 못써요. 두렵고 모르거든요. 다른 것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람도 많아요. 결국에는 인생을 보는 시각의 새로움이 중요해요. 이것이 드라마의 감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어떤 캐릭터와 대사, 이런 것은 일회성의 감각이에요. 드라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일회성의 감각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대중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저도 그런 의미에서 트위터(@heymrlee)와 블로그(blog.naver.com/keewon77)를 하고 있어요.
“‘하얀거탑’을 할 때는 작가로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을 때죠. 오래 투자했는데 이게 끝나면 나도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생각들, 분노, 절망, 나의 욕망이 드라마 주인공에 잘 녹아들었죠. 장준혁 캐릭터는 나의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죠. 또, 이런 작품을 하면 후회는 없겠다, 이것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 ‘하얀거탑’ 전에는 단막극을 쓰며 음악잡지 객원 기자도 했지 않나요?
▶ 그 전에 나름대로 단막도 하고 특집극도 하고 미니도 하고… 과정을 다 거쳤죠. 하지만 단막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않으니까. 요즘은 한 작품만 하고 사라지는 작가들 많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그런 과정을 거의 10년 겪었고, 드라마 데뷔로 치면 8년 정도 됐습니다.
- 출세작 ‘하얀거탑’ 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 기본적으로 신인작가가 작품을 갖고 나오면 오리지널리티가 없어져요. 다 뜯어고치기 때문에 누더기가 되죠. ‘하얀거탑’을 보고 이 시대에 필요한 드라마 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일본에 있는 원작자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하지만 현지에서 드라마에 간섭을 많이 하는 만큼 해외에서는 더 컨트롤이 안 되니까 안 판다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에이전트도 부정적이었죠. 그래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 책을 다 읽고 ‘남의 나라에서 국적불명의 아이가 되게 하지 않겠다, 원작의 향기와 메시지를 잃지 않게 제대로 해보겠다. 기회를 달라’고 편지를 보냈죠. 그 후 연락이 왔어요. 일본 에이전트도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더군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겁니다.
- 당초 ‘하얀거탑’의 성공을 기대했던 분위기는 아니라고 하던데요?
▶ 드라마가 인간의 얘기, 욕망을 가진 인간이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데 장애에 부딪히고 그걸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충실하면 되지 않겠냐 생각했죠. 사실 방송에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첫 방송부터 폭발적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저도 그 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 배우와 연출이 잘 한 것이고, 담고 있는 이야기가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겪는 문제여서 반응이 있었던 것 같아요.
- ‘하얀거탑’은 출세작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 작가로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을 때죠. 오래 투자했는데 이게 끝나면 나도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생각들, 분노, 절망, 나의 욕망이 드라마 주인공에 잘 녹아들었죠. 장준혁 캐릭터는 나의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죠. 또, 이런 작품을 하면 후회는 없겠다, 이것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 김명민 신드롬이 일 정도였는데요, 작가로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잘 했죠. 첫 장면에서 심장에다 에피네프린 박아 넣는 장면이 있었어요. 나는 그냥 ‘힘있게 박아 넣는다’라고만 썼는데, 그냥 단순히 쿵 하는 게 아니라 끝에서 ‘탁’ 멈추고 뺄 때도 ‘탁’ 힘줘서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난 거기까진 안 쓰는데 거기까지 하더라고요. 보면서 저 정도로 연구, 분석을 했구나, ‘김명민 저 배우 괜찮다’ 생각했죠.
- 막장 드라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 다 필요하죠. 막장 드라마도 순수 드라마도 직업 드라마도. 하나의 장르에만 치우치면 문제가 되는 거라고 봐요. 막장 드라마는 제작비가 적은 이유도 한몫 했어요.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결국 다양 드라마가 나오는 게 중요해요. 시청자들의 선택권이 중요하죠. 10년 동안 봐온 바로는, 일부 반짝 작가들은 감각적이지만 후속작이 없는 경우가 있어요. 감각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기 힘들죠.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감각은 통찰력이 아니라 그 시대의 유행이에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감각을 두고 봤을 때 김수현 선생님은 감각이 있어요. 항상 인생을 정확히 꿰뚫어보기 때문이죠. 심미안이 감각이지 표현적인 것은 감각이 아니라고 봐요. 인생을 보는 태도, 사람을 보는 시각이 새로워야 하죠
- 자신은 어떤 쪽인가요?
▶ 난 드라마가 굉장히 어려워요. 어느 특정 사람을 만족시키는 건 쉽지만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건 어렵죠. 시청률 잘 나오는 작가, 대박 바라는 작가? 제 경우엔 그런 타입은 아니에요. 그런 작가이기보다 항상 글을 쓰며 진화하고 발전하는 작가가 되려고 합니다. 다음 작품만 쓸 수 있으면 된다고 봐요. 작가는 대박 한 번으로 뜨고 내리 두 번 망하면 기회가 없죠. 작가가 괴로운 직업인 이유는 매번 작품이 검증되어야 하고, 탈락되면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이지만, 치열한 직업이죠.
- 언젠가 캐스팅해야지 하면서 눈여겨 보는 배우는 없나요?
▶ 그렇지는 않아요. 둔감한 편이라서요. 쓸 때 특정 배우를 생각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것은 장점 외에 한계도 있어요. 기본 이미지만 갖고 쓰니까 다른 게 못 나와요. 기본적으로 봤던 걸 바탕으로 쓰게 되면 했던 게 또 나올 수밖에 없죠. 내 상상으로 써야 새로운 것이 나와요. 또, 사심이나 개인적 호감이 들어가면 이상해지니까요.(웃음)
-슬럼프에 빠지기 쉬운 직업 같아요. 어떻게 극복했어요?
▶ 그래서 사라지는 작가들이 많아요. 이 바닥은 소문으로 좌지우지 되요. 나의 가장 큰 소문은 ‘하얀 거탑’을 내가 안 썼다는 소문이었어요.(웃음) 내가 썼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소문에 일일이 신경을 쓰면 내가 내 일을 못하게 돼요. 다른 사람들이 내게 갖는 관심은 잊고, 내 작품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내겠다고 결심하고 하면 되요.
-드라마 작가로서 갖춰야 하는 것은 뭐라고 보나요?
▶ 세상과 인생을 보는 자기만의 따뜻한 시각, 자기만의 시선이 있어야 해요. 긍정적인 사람이 드라마를 쓰는 것이라고 봐요. 휴머니즘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 그리고요?
▶ 감성과학이라고 생각해요. 감성이 있어야 되고 과학적 논리가 있어야 해요. 요즘 드라마는 논리 없는 드라마 많은데 앞뒤가 맞아야 합니다. 김수현 선생 작품을 보면 감정과 논리가 딱 맞아요.
- 앞으로의 드라마 시스템은 어떻게 내다보세요?
▶ 미국 드라마의 크리에이터 시스템처럼 체계적인 작가 시스템을 바탕으로 시즌 드라마가 나온다면 그런 면에서 좀 더 좋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고, 그게 성공하면 그런 추세로 갈 듯 해요.
- 차기 작품은 구상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두 가지 정도 있어요. 내 드라마에 멜로가 없다고 하지만, ‘제중원’에서 약간 해결된 부분도 있고, 미흡한 부분도 있었죠. 나중에 뚜껑 열면 알게 되겠죠.(웃음)
- 아직 노총각인데 결혼 계획은 없나요?
▶ 올해나 내년엔 무조건 결혼하려고 합니다. 외롭습니다. 이제는 안락한 가정 속에서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 만날 일이 쉽지는 않아요.(웃음) 주변에서 가끔 소개팅 해준다고는 하는데, 주로 “저희 엄마가, 이모가 작가님 팬이에요” 하시거든요. 하하하!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향희 기자 happy@mk.co.kr/사진=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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