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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륜산에 둘러싸여 꼭꼭 숨어있는 나리분지를 만나기까지, 제작진은 꽤 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전날 내린 폭설로 4륜구동 트럭이 멈추는 바람에 무거운 촬영장비를 짊어지고 걸어간 제작진은 우여곡절 끝에 나리분지에 도착했다. 카메라에 담긴 나리분지는 감탄이 절로 나는 천혜의 비경이었다.
나리분지는 눈이 많이 온다는 울릉도에서도 한 겨울이면 3m 이상의 눈이 내리는 다설지다. 그 때문인지 눈 내리는 나리분지 마을에는 사람 한 명 볼 수 없었다.
폭설이 내리는 날 유일하게 마을 주민들을 볼 수 있는 곳은 각 집의 지붕 위다. 하루 반나절이면 50cm는 거뜬히 쌓이는 눈의 무게에 지붕이 무너질까봐 온 가족이 동원돼 눈을 치운다.
인력으로 치울 수 없는 차도는 제설차가 동원된다. 하루에도 서너 번 나리분지의 길을 터주는 제설차 없이는 외부와 소통조차 할 수 없다.
한파에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제설작업인들은 “눈이 오면 2,3일 씩 집에 못 들어 간다”며 “이렇게 눈이 많이 올 때는 자정을 넘겨 작업한다. 집에 오갈 수가 없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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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설국을 보여주겠다"는 남편의 말이 인연이 돼 나리분지에 가정을 꾸린 두순 씨는 지금은 ‘또순이’로 통하며 마을의 막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결혼하고 처음 나리분지에 왔을 때는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에 후회도 많았다. 하지만 나리분지서 스물 두 번째 겨울을 맞는 두순씨는 나그네를 위해 항상 문을 열어둘 만큼 나리분지 사람이 다 됐다.
2년 전 나리분지로 귀농한 예병호씨는 나리분지에서 가장 외딴 곳에서 사는 인물이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소도 키우며 의욕적으로 귀농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나리분지 생활을 걱정했지만 친척보다 더 자주 만나는 이웃들 덕분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그의 부인은 몸이 좋지 않아 육지 병원에 입원해 있어 지금은 언어장애가 있는 형님과 단 둘이 지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웃들이 틈틈이 예병호 씨를 챙기고 나선다. 마을 모임에 갔다 돌아오는 길, 예병호 씨의 손에는 이웃이 챙겨준 반찬이 가득 들려있다.
그는 “가끔 고향 생각도 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며 “나리동이 아니었으면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이렇게 정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감사함을 전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고립되는 마을.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과 단절되는 겨울이 답답하지 않냐는 질문에 주민들은 나리분지의 겨울은 ‘겨울잠을 자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봄에서 가을까지 이어지는 농번기를 지내고 이듬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겨울은 이들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고영호 씨는 “봄이 아름다운 건 혹독한 겨울이 있기 때문”이라며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작물이 더 잘 자랄 수 있어 풍년이 기대된다는 주민들에게 나리분지의 겨울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하얀 눈을 닮은 이들은, 따뜻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KBS 방송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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