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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남부 경제 중심지 동나이성 연짝공단은 베트남에서 가장 큰 공단인 동시에 한국기업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으로 이 나라 전체 공장의 20%를 차지한다.
화려하고 혼잡한 호찌민시를 벗어나 차로 1시간 30분 정도 달려가면 점차 건물들이 낮아지고 넓은 들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공장건물들을 찾아가 보면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인 반가운 한국의 얼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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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본사에서 10년 동안 근무하다가 7년 전 베트남으로 발령받은 그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더위와 싸워야했고 베트남 직원들과의 의사소통과 싸워야 했다”며 “극도의 인내심이 필요한 곳 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곽창훈 상무는 공장의 건립부터 함께한 초창기 멤버다. 1997년 투자를 결정했을 당시 이곳에 있던 한국 기업은 단 두 군데 뿐 이었다. 그는 지금의 공단으로 발전하기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산증인으로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터전을 잡고 발을 내딛어 공장을 성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하루하루가 드라마고 영화 같았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나는 일로 추억할 수 있지만 그때는 굉장히 절박했다”고 말한다. 그 오기와 뚝심이 허허벌판 위 꽃을 피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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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히 홀로 명절을 보낸 지도 어느새 6년째, 수첩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가족사진 속 아이들은 이미 훌쩍 커버렸다. 하지만 그의 외롭고 고된 타지생활을 이겨낼 수 있게 했던 힘은 사랑하는 가족이다. 그는 “이젠 내 자신을 위해 사는 것 보다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며 “고생하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가족사진을 쥔 손에 힘을 꼭 준다.
연짝공단에서 보기 힘든 여성사장 최수호 씨는 38년 째 봉제업에 종사하고 있다. 7~80년대 대한민국을 이끈 산업이었던 봉제업의 추억 때문일까, 그녀의 거대한 공장 풍경은 보기에 전혀 낯설지 않다.
그녀 또한 17살 바느질일부터 시작해 이곳까지 올랐다. 최 씨는 “어릴 때는 열악한 환경 속 공순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며 “지금은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이들을 보면 뿌듯하다”고 웃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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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장에 있는 6명의 한국 직원뿐 아니라 연짝공단서 근무하는 모든 한국인들 중 최고령자다. 그럼에도 공장 내 직원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체력이 다할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웃으며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곳의 사장 피현규 씨는 고무장갑 하나에 승부를 걸고 베트남 땅을 밟은 지 올해로 11년 째다. 숱한 시행착오와 각고의 노력 끝에 이만큼 자리잡게 됐다는 그는 고무장갑 하나에 혼을 불어 넣는 장인이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고무장갑을 만드는 것이 목표
고국의 설을 앞두고 이들은 “제사음식보다도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어머니의 ‘된장찌개’다”며 “그래야 또 반년을 든든히 버틸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리움을 전한다. 혹서의 땅 연짝공단에는 그리움보다 진한 땀방울이 있었다.
사진=KBS 방송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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