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주인공
기상 캐스터들에게는 한 해 중 가장 바쁠 시기다. 기상청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특보를 시청자들에게 발 빠르게 전달해야 한다. 출퇴근길 도로 교통상황부터 빨래를 언제 해야 하는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영역까지, 장마철에는 하늘 소식에 유난히 신경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때로는 생존 문제까지 거론되는 위급한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방송사 시스템 속에서 볼 때 장마철 만큼은 기상캐스터가 주인공이죠. 시청자들이 제가 전달하는 소식에 따라 계획을 세우거나 일정을 조율하니까요.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소식들에 집중도도 유난히 높고 평소 전하지 않는 비와 관련한 이야기들도 전달해야 하니 제일 바쁜 시간이죠. 운 좋게도(?) 처음 입사하자마자 장마철이어서 혹독하게 많이 배웠어요. 실시간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시스템이다 보니 지역을 다르게 말한다거나 화면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실수까지 했거든요.”(웃음)
전달 방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정규뉴스에 비해 표현방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기상캐스터라 재미있는 표현도 많이 발견된다.
“이런 날이면 물폭탄이 콸콸 퍼붓듯 쏟아지니 슬리퍼를 챙겨 회사 앞에서 갈아 신고 퇴근 후에는 좋은 사람들과 김치부침개에 막걸리 한잔이 생각난다는 등의 이야기들도 할 수 있죠. 물론 수해가 있을 만큼 심각할 때는 어느 때 보다 더 진지하게 방송을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우산 없이 다니는 기상캐스터
기상캐스터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날씨 얘기를 물어보고 지나간다. 또 누군가 날씨 이야기를 하면 귀가 쫑긋해지는 것도 분명 일종의 직업병이다.
“오늘만 해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오늘 비온다는 얘기 없었는데’라며 볼맨소리를 하는 학생들을 봤어요. 제가 어제 분명 5~6번씩 방송에 나와 말씀드렸는데.(웃음)”
하지만 실제로 조미령 기상캐스터는 비가 웬만큼 오지 않으면 우산을 잘 챙겨다니지 않는 편이다.
“기상캐스터가 비오는 것도 모르고 우산을 안가지고 왔냐고 구박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일부러 안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게 아니면 짧게 비 맞는 거 전 좋아하거든요.”
그런 이상 취향(?)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됐던가 보다.
“전라남도 남원에서 자라고 학창시절을 보냈거든요. 도시에서 내리는 비 하고는 청량감이 확연히 달라요. 물론 제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슬리퍼로 갈아신고 신고 친구들과 비 맞으면서 집에 가는 길은 기분이 묘하게 좋았어요. 한번은 어떤 남학생이 우산을 손에 쥐어주고 휙 돌아 도망가는 로맨틱한 이벤트도 있었죠.”(웃음)
비오는 날 누가 생각이 나세요?
“비오는 날 누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나세요?”
조미령 기상캐스터가 대뜸 물었다. 우물쭈물 하고 있자 “이런 날 생각나는 사람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겠죠?”라고 말을 이었다.
누구든 비오는 날에 추억 한 토막 쯤은 있기 마련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식당 문을 나설 때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모를 비가 쏟아지고, 남자가 아무 말 없이 편의점까지 달려가 우산하나를 사오는 장면이나 젖은 옷을 손수건으로 남자의 어깨를 닦아주는 여자의 표정은 흔할지 모르지만 분명 두 사람에게 오래오래 추억된다.
“누군가에게 고백하기 좋은 날이죠. 비오는 날은” 뭔가를 떠올렸는지 한 옥타브 정도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려다가 머뭇거렸다. 호기심이 빼꼼히 올라왔지만 물을 타이밍을 읽었는지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비 소리 안에 있으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 좋은 것 같아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고백을 받거나.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다면 꼭 비오는 날에 하세요.” 그 이야기는 꼭 다른 누군가의 것일 필요는 없다.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도 그날은 더 잘 들린다.
비올 때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미령 기상캐스터는 “억지로 힘겹게 우울함을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 있나요?”라고 말했다. 비를 안 맞으려고, 옷을 적시지 않으려고 계속 숨고 피해도 결국 빗속에 있으면 어깨나 양말이 젖을 수 밖에 없다. 그냥 젖은 김에, 라고 생각하고 맞기 시작하면 그게 더 기분이 편해질 지 모른다. 조미령이 우산을 가져나가지 않는 이유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어차피 길어야 며칠이면 해가 날 텐데요. 아무리 긴 장마라고 해도 말이죠.”
조미령이 추천하는 비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보고 싶은 영화
‣ 영화 ‘라디오 스타’ OST 중 ‘비와 당신’
왕년의 톱스타와 그를 수족처럼 보필하는 매니저 안성기의 진한 우정을 그린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최곤 역을 맡은 박중훈이 부른 곡이죠. 극중 한때 톱스타 였던 최곤의 히트곡으로 영화에 주제곡 처럼 쓰이는 노래에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를 맞고 서있는 박중훈에게 말없이 다가가 자신은 비를 맞으며 우산을 펼쳐주는 장면은 여름 소나기 처럼 가슴 한구석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죠.
‣ 브라운아이즈 ‘위드 커피’(With Coffee)
브라운아이즈 1집 수록곡으로 ‘벌써 1년’과 함께 큰 사랑을 받았던 곡이죠. 커피향이 비오는 날 더욱 진하고 향기롭게 느껴지기 때문일까요. 비오는 날 브라운 아이즈의 ‘위드 커피’ 만큼 따뜻한 노래는 또 없는 것 같아요. 벌써 10년전 노래네요. 브라운 아이즈가 당시 ‘얼굴없는 가수’였던 까닭에 뮤직비디오에는 지금 톱스타가 된 신민아씨가 등장하죠. 묘한 매력을 가진 신민아씨를 세상에 알린 노래기도 하네요.
‣ 아이유 ‘혼자 있는 방’
‘국민 여동생’ 아이유의 ‘리얼’(Real) 앨범에 ‘좋은날’과 함께 수록된 곡이에요. 창밖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혼자 방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곡이죠. 비가 내릴 때 누군가 그리워지는 느낌을 가장 담백하고 순수하게 표현한 곡이에요. 아이유는 이 노래 가사를 가위 눌린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거라네요. 가끔씩 꿈에 나타나는 남자귀신을 기다리는 내용이라고 하더군요. 약간 오싹하네요. 하하.
‣ 영화 ‘클래식’
비와 관련한 명장면이 많은 영화죠.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 속에 갇힌 손예진을 조인성이 발견하고 달려오죠. 자신의 자켓을 벗어 머리위로 펼치고 ‘하나 둘 셋’ 하며 뛰어가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죠. 조인성을 보낸 후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서관은 왜 이리 가까운 거지”라고 말하는 손예진의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것 같아요. 이때 흘러나오던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도 명곡이죠.
‣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비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비의 계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먼저 떠난 아내가 비오는 어느 날 실제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에요. 아들 같은 아빠와 아빠 같은 아들이 투닥투닥 사는 모습도 귀여웠던 것 같아요. 영화 OST에 수록된 ‘시간을 넘어서’도 감동을 배가 시키죠.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현우 기자 nobodyin@mk.co.kr/사진 팽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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