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중 ‘써니’ 개봉을 앞두고 급거 귀국, 바쁘게 영화 홍보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심은경에게선 다소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인터뷰 중간 중간 미소와 함께 입을 오물거리며 재잘대는 모습에선 옆집 사는 예쁜 여고생의 순수함이, 반짝이는 눈동자에선 연기에 대한 어린 여배우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극중 나미는 전라도 벌교에서 서울로 갓 전학 온 모범생으로, 일곱 명의 동급생들과 함께 그룹 ‘써니’를 결성한다. 요즘 중·고등학교에서 볼 수 있는 무서운 언니들이나 ‘일진’ 같은 느낌에서 순도를 200% 끌어올린, 그야말로 순수한 모임이다.
영화 속 찰랑거리는 ‘칼’ 단발머리는 뜻밖에도 가발이었단다. “무려 8시간 동안 한 땀 한 땀 공 들여 만들어진 가발이랍니다.” 최근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 만난 심은경은 볕이 따가운 가을부터 싸늘한 초겨울까지 함께 한 ‘써니’와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색다른 경험을 한 것 같고, 옷을 보는 것도 되게 재미있었어요. 뭔가 촌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제 의상 중에 마음에 든 게 청청 패션이었어요. 편안한 감도 있고, 뭔가 나미스러워서, 웃기기도 하고. 하하.”
지금 보면 촌티 패션이지만, 당시로선 제일 잘 나가는, 패션리더가 되고 싶었던 소심하면서도 대범한 소녀, 임나미.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지난해 여름이었다. 드라마 ‘나쁜 남자’를 끝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그녀에게, 운명처럼 ‘써니’가 다가왔다. 계획했던 유학을 미루면서까지 ‘써니’ 호를 타게 된 심은경. 어떤 부분이 그렇게 끌렸을까?
“포기하기엔 너무 부족함이 없는 시나리오였어요. 열 네 명의 여배우들이 나오는데, 누구 하나 튀는 캐릭터 없이 모두가 살아있었죠. 놓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고, 후회 없이 연기했습니다.” 그렇게 나미로 변신한 심은경은 빙의나 만취, 사투리, 첫사랑의 아픈 기억 등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감정 연기를 보여준다.
비교적 센 사투리를 소화하기 위해선 특훈이 필요했다. 과외 선생님은 다름 아닌 연기자 이한위였다. “영어 과외 받는 느낌으로 너무나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셨어요. 정말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잘 가르쳐주셔서 정말 많이 배웠고,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오매’ ‘옴매’ ‘워매’ ‘웜마’ 등의 차이를 알게 됐다며 까르르 웃는다.
불후의 명장면이 탄생한 순간, 컷 이후 현장 스태프들의 박수세례를 받았다는 심은경은 “저는 제가 해야 할 연기를 했을 뿐인데, 박수가 터져 나오니까 좀 쑥스러웠어요”라고 소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주길 바랐지만 “모든 게 기억에 남는다”는 답변으로 대신한다. “이번 연기 같은 경우, 저 스스로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전보다 캐릭터에 진심으로 다가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잘 표현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나오는 것도 있어서 고민이 많았죠.”
어린 나이지만 어느덧 연기 경력 7년차, 연기에 대한 생각과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진지하다. “완벽주의자처럼 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 감독님을 괴롭혀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있고요. 혼자 있을 때 울적한 적도 있었죠.” 그동안 보여줬던 작품 속에서 워낙 당찬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기 때문일까. 조곤조곤 연기 고민을 털어놓는 심은경이 외려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스크린과 브라운관 속, 그녀를 먼저 접하고 생긴 때문이리라. 곧바로 실제 심은경의 성격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나미는 참 대범한 성격이에요. 직접 찾아가 얘기도 하고. 저는 나미와는 달리 그런 면은 없는 것 같아요. 저를 싫다고 하면 ‘왜 나를 싫어하지’ 생각하며 상처도 받고, 속으로 ‘흑흑’ 하며 생각하는 편인데, 나미는 그런 면에선 대담한 면이 있는 친구더라고요. 그런 면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당찬 부분이요? 글쎄요... 어느 순간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에는 주저 없이 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겁도 먹고 쫄기도 잘 쫄아요.”
이쯤 되니 ‘열여덟’ 심은경의 ‘현재진행형’ 고민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다 보니 오히려 고민이 없어진 것 같아요. 예전엔 무언가 연기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뭔가 불안했던 것도 있었고. 늘 혼자일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외로워하기도 했는데, 유학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어요. 영어도 빨리 늘었으면 하는 생각은 있지만, 몸도 마음도 바빠서 그런지 고민할 새도 별로 없네요.”
그렇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심은경은 어떤 모습일까? “음... 철 없는 10대?(웃음) 공상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요. 나미 같이, 평범한 면도 있고요.”
공식적으론 배우이자 ‘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여느 또래와 같은 사춘기 여학생이다. 카메라 앞에선 당차기 그지 없지만, 스스로 소심함을 고백할 정도로 여린 그녀에게 뜻밖에 광풍처럼 불어닥친 서태지의 딸이라는 루머는, 견디기 힘든 충격이자, 연예인으로서 겪는 통과의례와도 같았으리라.
평범한 가정주부가 된 ‘써니’ 속 나미처럼, 40대 즈음엔 어떤 모습일 것 같은지 묻자 대번 “어른이 되기 왠지 싫다”고 답한다. “아직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아요. 어른이 된다는 게 낯설기도 하고, 어색해서요.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면 안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이 좋은 것 같아요.”
원래 사춘기 때는 어른이 되기를 동경하고, 어른이 된 뒤엔 사춘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일반적일 것 같은데, 의외다. 그래, 지금은 뭐가 그렇게 좋아요?
“철 없는 부분도 있고, 사춘기의 성장통이라는 게 지금은 마음 아플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요. 나만의 성장통? 그런 느낌이 좋아요. 10대의 뭔가 서툰 느낌이 좋아서, 이런 걸 오래 가지고 가고 싶어요. 2년 뒷면 스무살인데, 어우 지금도 안 믿겨요.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애어른’ 같으면서도 ‘어른아이’ 같은 심은경의 솔직담백한 답변이다.
영화 개봉(4일) 전 아쉽게도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심은경에게 “영화가 장기 흥행에 성공해 6월 말까지 상영 중이라면 나미의 청청 패션 그대로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만나자”고 제안하자 “꼭 그러겠노라”며 웃으며 답한다. 스크린 속에서 툭 튀어나온 나미를 만나고 싶다면, 올 봄 오랜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을 찾는 건 어떨까.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팽현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A도 모바일로 공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