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국제수학연맹(IMU) 유튜브 캡처] |
- 필즈상을 수상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
= '잘 됐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겠다'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요즘의 조용한 삶이 흔들릴까 걱정도 됐고,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뜻깊은 일이지만 길게 보면 삶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 한국계 첫 필즈상 수상이다. 이러한 성취를 기다려 온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 국제수학연맹(IMU)에서 올해 2월 한국의 국가 수학등급을 최고 그룹인 5그룹으로 상향 조정했다. 1981년 1그룹으로 가입한 이후 최단 기간에 5그룹으로 승격한 것이다.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 수학자들의 업적이 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아 가능했다. 다른 선진국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최근의 빠른 발전으로 미뤄봤을 때 수학이 제법 우리 적성에 맞는 듯하다.
- 지난해 매일경제와의 인터뷰(2021년 5월 8일자 A1·17·18면 보도)에서는 필즈상을 아주 높은 확률로 받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 감사하게도 학계 동료들이 제 역할을 부각해줬지만, 삶과 공부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생과 동료 뿐 아니라 대중과 접할 일이 많아지는 만큼 조금 다른 톱니바퀴의 역할을 맡게 되지 않을까한다
- 물리천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수학에서 꽃을 피웠다.
= 대학 입학 때는 물리천문학이 멋져 보였고, 수학이 황량하고 형식적으로 보였다. 물리학과 천문학은 좀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러나 물리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정해진 방향 없이 설렁설렁 공부하다보니 어려운 대학 공부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결국 3학년 1학기에 우울증에 걸리며 모든 과목에서 낙제해버렸다. 자연스레 대부분 수업에 출석하지 않게 됐는데, 당시 특별히 존경하던 고(故) 홍승수 교수님(천문학자)께는 꼭 뵙고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제 말을 잘 들어주신 후 잘 쉬고 돌아오라고 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준 것이 큰 위안이 됐다.
- 구구단 떼는 것도 늦었고, 한 때는 시인을 꿈꿨던 소년이 수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은 언제인가?
= 기본적인 수학 수업 너머의 '순수 수학'을 처음 들은 것은 위상수학이었다. 대학 4~5학년 무렵 마음을 추스르고 공부하기 시작한 때다. 매우 형식적인 주제를 다루는 과목이었는데, 그 때 '의미 과다'로 고생하고 있던 저에게 꼭 필요한 공부였던 것 같다. 머리를 비우고 도구처럼 사용하니 마음이 조용해졌다. 그 다음해에 마침 서울대를 방문한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1970년 필즈상 수상)에게 대수기하학을 배우며 수학에 완전히 빠졌다.
- 헤이스케 교수의 수업이 전환점이 됐나
= 20대 중반에 헤이스케 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실시간으로 수학을 '하는'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악보만 읽던 사람이 처음으로 음악을 들은 것 같았다.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서 먼 과거의 누군가가 쓴 정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매일 헤이스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갔고, 헤이스케 교수는 특별히 정돈하려 하지 않고 이런저런 수학 얘기를 들려줬다.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항식같은 근본적인 대상으로 조금 다룰 수 있게 됐다. 수학 외적인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저를 꾸준히 만나주는 데서 자신감을 얻었다.
대화가 끊어질까 최대한 알아듣는 척을 했지만 헤이스케 교수도 제가 수학을 거의 모르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 때 들었어야 할 말을 다 해줬다. 이전까지 수학이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과정이었다면, 헤이스케 교수는 언제 쓰일지 모를 퍼즐 조각을 하나씩 주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사용하지 못한 퍼즐 조각 몇 개를 들고 있다.
↑ 허준이 교수 [이충우 기자] |
= 아무리 대학 성적이 그저 그렇다고 해도, 필즈상 수상자(헤이스케 교수)의 추천서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했는데 잘 안됐다. 합격 이메일이 올까 해서 자다가도 일어나 매 시간 새로고침을 누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일리노이대에서 뒤늦게 연락이 와서 무척 기뻤다. 박사과정에 진학하면 정말 신나게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는 그 때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 박사과정 1년차에 리드 추측을 증명했다. 난제 해결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리는지 궁금하다.
= 발상이 어디에서 오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은 개인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이다. '그렇구나!' 하고 깨달은 극적인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지금의 저는 3년 전의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몇 가지 수학적 사실을 이해하지만, 3년 사이 언제 이해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기억하는 순간은 이미 그 부분을 이해하고 있다고 깨달은 날이다.
우리 마음이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일단 발상이 의식 속으로 뚜렷하게 들어오면 문제 풀이는 보통 큰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 수학 연구의 어떤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끼나
= 이산(조합론)과 연속(기하학)은 인간 수학적 사고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저를 포함한 수학자들은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매우 재미있어한다. 정말로 근본적인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고, 궁극적으로 그 둘 사이의 구분이 인위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뛰어난 지능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화시켜 온 외계인이 있다면 우리와 전혀 다른 직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 젊은 학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 스스로에게 친절했으면 한다. 어려운 주제에 접근하는 데 가장 중요한 태도다. 오랜 시간이 드는 힘든 일을 마음 맞지 않는 동료와 하고 싶지는 않지 않나. 자기 자신과도 마찬가지다.
- 증명에 도전하고 있는 또다른 난제가 있는지,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꿈꾸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 목표를 미리 정해두면 마음이 경직되기에 어떤 문제를 '내가 꼭 풀어내겠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한다. 마음은
앞으로는 조용히 공부하며 아이들이 자라고 저와 아내가 늙어가는 과정을 천천히 느낄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이었으면 한다.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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