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준비해 온 시험을 끝내고 난 후의 후련함도 있지만 답안지를 다시 복기해보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쉬움, 즉 '좀 더 잘 볼 수 있었는데' 하는 미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31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한국은행을 떠나는 분들이 한결같이 하시던 말씀은 '만감이 교차한다'였는데, 막상 제가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다"면서 "예전 학창시절 마지막 시험에서 막 답안지를 제출했을 때의 심정이 바로 이러했으리라 생각한다"며 이같이 퇴임 소감을 말했다.
이 총재는 43년간 '한은맨'으로서 걸어온 길을 곱씹으며, 몇 가지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먼저 총재 취임 당시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국민과의 신뢰 구축을 꼽았다.
이 총재는 "저는 중앙은행의 유일한 존립기반은 국민으로부터의 신뢰라는 점을 되새기며 첫 업무를 시작했다"면서 "국민의 신뢰는 일관성 있고 예측가능한 정책 운용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통화정책은 포커 게임처럼 내 패를 감춰야 하는 비협조 게임(non-cooperative game)이 아니라 패를 보여주고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협조게임(cooperative game)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이 총재는 "정책의 출발은 항상 시장과의 소통이었으며, 정책결정의 적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장참가자와의 인식의 간극을 줄여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서 "그러나 시장과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의사전달이 충분했는지, 그래서 신뢰가 온전히 형성됐는지는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며 토로했다. 또 "현재 상황과 미래 흐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소통해야 하는데 이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지난 8년간 세월호 사고를 시작으로 메르스 사태, 브렉시트, 미·중 무역갈등과 세계화의 후퇴,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세계 보건위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그야말로 격랑의 소용돌이를 지나왔다고도 얘기했다.
그는 "개별 사건의 충격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파급될지 예상하기도 어렵거니와 일련의 사건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경제 전체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지 가늠조차 쉽지 않았다"며 "오죽하면 저명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드가 경제전망을 점성술에 비유하지 않았겠습니까? 최근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코로나 위기 이후 경제예측이 어긋나고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졌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 역시 높은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신뢰가 통화정책의 성과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중앙은행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경제여건의 불확실성 뿐만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에 대한 근본적 재고찰(rethinking)에 대한 논의가 제기된 점도 통화정책을 수행하는데 어려운 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시인했다.
이 총재는 "제 임기중 대부분은 기존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많이 다른, 매우 익숙치 않은 새로운 거시경제 환경에서 통화정책을 운용하지 않았나 싶다"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장기간 이어졌음에도 세계경제가 저성장·저물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상황은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밝혔다. 이어 "좀처럼 풀리지 않은 이러한 수수께끼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더 복잡해지고 난해한 고차방정식이 되어 버렸다"며 "가계부채 누증 등 금융불균형이 심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사라져 버린 줄로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나면서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체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고용, 양극화, 불평등, 기후변화 리스크 등에 대한 중앙은행의 역할 확대 관련 고민도 털어놨다.
이 총재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은행의 법적 책무에 금융안정이 추가된 이래, 최근에는 고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통화정책 운용에 이를 어떻게 반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여러 가지 사회문제 해결에 경제적 처방을 동원하고자 하면 할수록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와 의존은 계속 늘어나게 될 것"이라면서 "경제구조나 제반 환경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되면 중앙은행 역할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수 있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이 총재는 조직운영과 관련해서는 기존의 인사 제도와 업무수행 방식에서 비효율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일과 직원 개개인의 전문성을 제고하여 중앙은행으로서의 정책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고 전했다. 다만 직원들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미흡했던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어느 조직이든 문화와 제도를 바꿔나가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사회 전반의 인식과 관행이 그 안에 녹아있는 데다 조직과 구성원간 추구하는 가치가 때로는 상충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옛말이 있는데 조직의 개혁에는 과단성도 요구되지만 꾸준함도 못지 않게 필요하다. 앞으로 어떻게 실행해 나갈 것인가는 이제 새 총재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자신의 후임으로 유력한 이창용 총재 후보자에 대한 기대도 드러냈다.
그는 "다음 총재로 지명되신 분은 빼어난 인품과 뛰어난 식견을 갖춘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라 생각한다"면서 "새 총재님의 풍부한 경륜이 여러분들의 열정과 결합되어 한국은행이 더욱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이 총재는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에 있는 문구를 읊으며 이임 소감을 갈무리했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는 문구처럼 이제 저는 한없는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세인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으로 돌아가려 합니다"고 마쳤다.
공교롭게도 이날 한은은 매년 전세계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 운용 상황을 평가하는 센트럴뱅킹(Central Banking)으로부터 '올해의 중앙은행'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1990년 영국에서 설립된 센트럴뱅킹은 각국 중앙은행 및 국제금융기구 관련 뉴스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2014년 이후 전세계 중앙은행과 글로벌 자산운용사 등을 대상으로 '올해의 중앙은행', '올해의 외환보유액 운용기관' 등을 매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센트럴뱅킹 심사위원회는 "한국은행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선진국 중 최초(2021년 8월)로 적기에 기준금리를 인상하였으며, 자산가격 상승 및 가계부채 증가 관련 취약성을 모니터링하고 대응하는 데 기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아울러 "기후변화에 대응한 정책 운용, 향후 도입 가능한 '디지털 화폐'에 대한 면밀한 사전실험 등을 추진한 점에도 주목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에는 미 연방준비제도가 '올해의 중앙은행'으로 선정되었으며, 한국은행은 2018년 '올해의 외환보유액 운용기관'으로 선정된 바 있다.
한편, 이 총재의 퇴임으로 당장 다음달 1일부터는 한은 역사상 최초로 총재 자리가 공석이 된다. 이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되기까지는 최소 1주일 이상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는만큼 당분간 통화정책 수장의 공백은 불가피하다.
다음달부터는 이승헌 부총재가 총재의 직무를 대행하는 한편 주상영 금융통화위원이 금통위 의장 직무대행을 맡게 된다. 주 위원은 금통위 의장 공석시 기자회견도 주재하기로 했다.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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