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계 단 21명 뿐인 레고 공인작가(LCP)에 이름을 올린 이재원씨 |
그러다 포장지를 푼 지 10분이 채 안돼 아이가 '엄마(아빠) 도와줘'라고 외치면 한숨 푹푹. "이것도 혼자 못해?" 한마디를 쏘아붙인다.
부모들의 이같은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레고 조립을 못하면 루저(loser)인가요?"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가 있다. 이재원(42·사진) 삼우종합건축사무소의 건축설계사다.
"레고를 가지고 놀아본 아이들이 더 잘 노는 것일 뿐이에요. 무엇을 만들었든 칭찬해주고, 공감해 주세요."
육아나 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12살 딸과 여전히 레고로 함께 논다는 그의 말에 왠지 귀가 더 쫑긋해진다.
본업은 건축설계사, 그것도 국내에서 가장 큰 건축사무소에서 일한다.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레고창작 활동을 한 덕분에 3년전 레고 공인작가(LCP·LEGO Certified Professional)가 됐다. 이후 더욱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이씨를 만나 얘기를 나눠봤다.
↑ 전세계에서 단 21명 뿐인 레고 공인작가(LCP)에 이름을 올린 이재원씨 |
의사, 변호사, 첼로리스트 등 본업을 가진 채 LCP로 활약하는 다른 나라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늘 시간에 쫓긴다.
"많이 바쁠 때는 하루 2~3시간 밖에 못 자는 날도 많아요. 본업에 지장을 주면 안되니까요. 잠 잘 시간을 줄여서 하는 일이 레고 작가로서의 일이라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 이재원 작가와 그의 딸 보원양이 함께 만든 레고 마스크 |
레고 마니아들 사이 꿈의 자격증으로 불리는 LCP를 딴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했다. 80년대 초반 당시 무역업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던 레고 모델까지 얻어 일찌감치 레고로 놀 수 있던 게 한 가지 행운이다.
↑ 이재원 작가가 코로나 의료진 응원을 위해 만든 레고 작품 |
"제가 만든 레고 성을 보고 아버지께서 유럽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아버지가 역사를 전공하셨거든요. 레고가 아버지에게 재밌는 얘기를 듣는 소재였다고 할까요. 어머니께선 제가 매뉴얼대로 모형을 만들면 과감히 부수는데 일가견이 있으셨죠. 다시 만들면 된다고 하시며 보자기에 섞은 후 주셨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나면 그게 무엇이 됐든, 절대 이상하다고 핀잔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집에 놀러오신 손님들 앞에서 '얘가 이런 재주가 있네요'라며 칭찬을 크게 해주셨어요."
↑ 이재원 작가가 만든 매트릭스 |
건축 설계나 레고는 각각의 로직(logic)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 로직만 잘 찾아 지키면 아무리 어려운 작품이라도 1~2주 안에 뚝딱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로직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봤다. 혹시 규격화 된 레고 매뉴얼이 레고만의 창의성을 오히려 저해하는 것은 아닐지,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이들이 레고 매뉴얼에 갇혀 획일적인 장난감을 만드는 것일 뿐이란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어서다. 매뉴얼대로 레고 조립을 완성하지 못하면 루저가 된 듯한 좌절감만 레고가 안길 뿐이란 주장마저 있다.
↑ 이재원 작가가 만든 후크선장 작품 |
레고 매뉴얼대로 꼭 만들지 못했더라도 아이 스스로가 루저라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놀아본 아이들이 잘 논다고, 처음부터 디테일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많이 (레고놀이를) 해보고 편하게 놀아본 아이들이 그 익숙함을 바탕으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낼 수 있는 것이죠."
이씨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작품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레고로 무엇을 만들든 칭찬해 주고 부모님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 이씨는 부모님께 받은 그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이제 딸 보원양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 이재원 작가가 만든 삼국지 영웅들 작품 |
영화 '기생충'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영화에 등장한 집을 레고로 만들었다. 해당 작품을 봉준호 감독에게 선물로 전하고 싶다고 한 방송에서 말한 뒤 봉 감독의 아들을 직접 만나 작품을 전하기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돼 봉 감독과 통화를 하고 사인도 받았다는 그는 "팬으로서 굉장히 감사하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며 해맑게 웃었다.
SNS를 통해 세계 곳곳의 레고 마니아들과 소통하는 그는 '핵인싸'이자 '레고 멘토'로 통한다. 최근에는 레고그룹이 창립 이후 9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여성 디자이너 유미나씨를 발탁한 가운데 유씨에게 인생 선배로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줬다.
"인스타로 연락이 왔더라고요. 최종면접을 앞둔다고 하기에 마치 제 일처럼 떨렸죠. 똑부러진 친구라 될 줄 알았어요(웃음)."
↑ 이재원 작가가 봉준호 감독에게 전달한 영화 기생충에 나온 집의 모습 |
"국내에 레고 마니아들이 참 많아요. 그래서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브릭코리아컨벤션을 통해 대결을 펼치기도 하지만 '레고 마스터즈'처럼 연령 제한없이 남녀노소 모두 다 축제 같은 느낌으로 즐기는 프로그램이 생긴다니 너무 기대가 되요. 중국판 레고 마스터즈 참가자들은 용이나 구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레고 공인작가 이재원씨의 활약 또한 기대가 된다.
[방영덕 매경닷컴 기자 / 유서현 매경닷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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