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와 해운업계가 세게 붙었다.
공정위가 지난 5월초 8000억원대의 초대형 과징금을 부과한게 발단이 됐다. 공정위는 해운업체들의 담합행위를 확인했기 때문에 과징금을 물릴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해운업체들은 업계 특수성을 무시한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며 공정위 주장을 일축했다. 이미 3년전에 알아듣게 소명까지 다해 다 끝난줄 알았는데 공정위가 막무가내식으로 나오니 법적으로 다툴수 밖에 없게 됐다며 하소연이다.
전세계 물류대란으로 해상운송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생존위기에 처한 국내 수출업체들을 돕기위해 한척의 선박이라도 더 확보하려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와중에 국가기관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고 했다.
더 황당한 것은 정부 부처들끼리도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해운업계 주무 관청인 해양수산부가 업계 과징금 부과에 반대하고 있지만 공정위는 요지부동이다. 물류대란에 화들짝 놀란 정부도 이번주중 해운업 재건전략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런데 공정위가 해운업계를 벼랑끝으로 밀어내는 조치를 강행, 정부 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혼란스럽다. 도대체 상황이 왜 이렇게까지 꼬이게 된걸까.
3년전인 지난 2018년 7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동남아지역에서 목재를 수입하는 업체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목재합판유통협회가 공정위에 해운업계 담합 의심 행위를 신고했다. 일부 사업자가 가격설정 등 공동행위를 통해 부당하게 시장을 장악하는 담합은 전세계 반독점기관이 금기시하는 행위로 가혹한 처벌이 뒤따른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해운업계에만 예외적으로 이같은 담합이 인정되고 있다. 해운업의 경우, 무제한 경쟁에 노출되면 출혈경쟁이 불가피하다. 이경우 다수의 선박을 소유하고 풍부한 자금력을 갖춘 일부 글로벌 대형선사가 시장을 장악하게 돼 궁극적으로 운임이 더 뛸수 밖에 없다. 이런 과당경쟁에 따른 독과점 부작용을 방지하기위해 전세계 모든 나라가 해운업계 운임 담합을 허용해주고 있다. 세계 주요 선사들이 공공연히 공동행위를 하는건 이런 예외규정때문이다.
우리 해운법 29조도 '외항화물운송사업 등록을 한 자는 다른 외항화물운송사업자와 운임·선박배치, 화물의 적재, 그 밖의 운송조건에 관한 계약이나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고 명시, 해운업계 담합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해양수산부는 국내 선사들이 과당경쟁으로 파산하는 상황을 막기위해 공동행위를 그동안 적극 장려해왔다.
이런 예외규정을 모른채 담합 신고를 한 해프닝에 대해 한국해운협회가 직접 한국목재합판유통협회를 찾아가 해운담합행위가 합법이라는 점, 그리고 담합을 했지만 해상운임을 담합가격이하로 제공했다는 점을 설명하자 고발자체를 취하했다. 한발 더나아가 그해 12월엔 담합신고자인 목재합판유통협회가 해운사에 대한 '선처탄원서'를 공정위에 제출하기까지 했다.
이후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3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지난 5월초 공정위가 돌연 과징금 부과 조치를 내리자 해운업계가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공정위는 HMM(옛 현대상선), 고려해운 등 12개 국적 선사 등 국내외 23개 해운업체에 대해 운임담합을 통한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그리고 2003년 4분기부터 2018년까지 15년간 해운사들이 한국~동남아항로에서 거둔 매출의 8.5~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따라 12개 국적선사가 부담해야 할 과징금 액수는 최대 5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해운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공정위는 법적으로 담합이 허용되더라도 '운임담합을 위한 공동행위가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논리로 과징금 부과결정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 근거로 공동행위 가입·퇴출 자유제한, 화주와의 협의 부재, 불성실한 운임 신고를 제시했다. 이에대해 한국해운협회는 자유로운 가입 탈퇴가 보장돼있고 미신고된 부분 등이 있더라도 공정거래법이 아닌 해운법에 따라 해수부에서 과태료 처분을 하면 될일인데 공정위가 일을 키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질은 담합이 합법이라는건데, 지엽적인 절차상 흠결을 문제삼아 꼬투리를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징금 대상이 된 동남아 노선의 경우, 경쟁이 치열해 지난 15년간 동남아 취항 선사 대다수가 영업적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담합행위로 얻은 부당이득 자체가 없었던 셈이다.
해운업계가 가장 어처구니 없어 하는것은 국내 중소기업들이 지난해보다 수배나 오른 사상최고의 해상운임비를 지급하더라도 수출 배편을 찾기 힘든 물류대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공정위가 과징금 부과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해운업체들이 한척이라도 더 임시선박을 확보, 중소기업들의 수출을 지원하려고 노력해왔는데 과징금이 확정되면 되레 선박을 팔아야할 지경이라고 한다.
지난 2017년 한진해운 퇴출후 국적 선박부족으로 지난해 하반기이후 국내 기업들이 수출에 커다란 애로를 겪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국적선사들의 선박 확보와 자금지원을 해야할 판에 되레 팔다리를 묶으려 하는건 말이 안된다. 해운업체도 타격을 받지만 수출길이 막히면 중소기업들에게
합법적인 담합과정에서 지엽적인 절차적 미흡이 있더라도 공정거래법이 아닌 해운법에 따라 해결하면 될일이다. 해양수산부와 공정위가 부처간 협의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수년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모처럼 활력을 찾고 있는 해운업계를 생존위기로 몰아넣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박봉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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