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을 기증한 이건희 회장의 정신을 잘 살려 국민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8일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이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 점을 기증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 전용관 검토를 지시하면서 우여곡절을 반복하며 110년 넘게 잠들어있던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가 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송현동 부지는 과거 삼성생명이 미술관을 건립하려다 철회하고 대한항공에 매각한 곳이다. 대한항공에선 7성급 한옥호텔 건설을 추진했지만 번번히 좌절됐다. 최근에서야 공원화가 최종 결정되며 논란이 일단락 됐다. 그런데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의 대규모 미술품 기증 발표가 나오면서 송현동 땅이 다시 소환됐다. 방대한 작품을 보관 전시를 위한 추가적인 공간이 필요한데, 미군기지가 이전하는 용산과 함께 서울 한복판 송현동 공원 부지가 적합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 28일 오후 주변 건물에서 내려다본 송현동 부지. [사진=하서빈 인턴 기자] |
주민들 "뭐든지 빨리 정해서 했으면 좋겠다"
지난 28일 만난 송현동 인근 주변 시민들은 부지 사용방식을 두고 번복이 많았던 만큼 하루빨리 송현동 부지가 자리잡길 바라는 심정이 커 보였다. 인근 주민 A씨는 "송현동 부지는 그동안 관리가 안 돼 온통 풀숲"이라며 "(송현동 부지)근처가 다 좁은 골목길이라 교통 문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송현동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A씨는 "(개발 정책이)또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믿진 않는다"면서도 "주변에 역사 관련 문화재나 박물관이 많다보니 문화시설이 들어오면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어 "코로나19 장기화로 매출이 많이 깎였다"며 "뭘하든 빨리 했으면 좋겠다. 어서 (매출을) 회복해야지, 여기서 더 깎이면…생각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과거, 송현동 부지는 삼성이 미술관을 건립하려던 곳인 만큼 의미가 작지 않다.
하지만 서울시는 정부 발표 전 연락 받은 내용이 없는 만큼 사실상 난색하고 있다. 30일 서울시 공공개발 관계자는 "송현동부지 공원화 계획 조정수칙이 된지 얼마 안 됐고 사전에 공유 받은 내용도 없다"면서 "현재 민간부지인데다 시유지와 교환된 후에도 소유권과 개발 문제 등이 있는 만큼 현 상황으로서는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다만, 서울시는 송현동 부지의 공원화 계획과 관련해 "LH와 부지교환 계약을 조속한 시일 내 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한항공 역시 LH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매매계약을 빠르게 체결하기로 했다. 다음달 4일 권익위 조정에 대해 서울시의회가 의결하면 속도가 더욱 붙을 전망이다.
계속된 계획 변경...내부 출입 금지된 채 방치
송현동 부지는 1780년 한양전도에도 나와있던 곳으로 소나무숲으로 둘러쌓인 구릉지라 경복궁을 보호하는 모습을 띄고 있다. 면적은 3만7000㎡(약 1만1200평)이다. 광화문과 안국역 중간에 위치해있다. 종로문화원, 안국빌딩, 덕성여자중 여고, 금호미술관 등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광해군 장인과 선조의 부마 등 왕족을 비롯해 영의정 같은 고관대작이 이곳에 살다 일제강점기 때 수탈된 뒤 해방 이후엔 미국대사관 직원숙소로 쓰였다.
이후 삼성생명(1997년)과 대한항공(2008년)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삼성생명이 사들인 이후 추진하려던 사업들이 계속 좌절되면서 방치됐다. 1997년부터 벌서 24년간 내부에 들어갈 수조차 없어 현재는 풀만 무성하게 자란 모습을 외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지난해 서울시는 대한항공 소유인 송현동 부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겠단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2008년 삼성생명에 2900억원을 주고 송현동 부지를 구입한 대한항공은 이 곳에 7성급 한옥호텔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서울 중부교육청이 학교환경위생 정화구역을 내세우면서 틀어졌다. 정화구역 지정해소를 위해 행정소송까지 나섰지만 2012년 최종 패소하면서 복합문화공간 등으로 재추진하려다 이마저 무산됐다.
이후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대한항공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송현동 부지를 민간에 매각하려 했지만, 서울시가 이곳을 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겠단 계획을 발표하면서 매각에 난항을 겪었다. 대한항공이 민간에 팔겠다며 입찰을 진행해도 단 1곳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국민권익위원회에 "서울시가 기업의 사유재산을 시의 문화공원으로 만들려 강행한다"며 고충민원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권익위의 중재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낀 제3자 매각방식이 확정됐다. 대한항공이 LH에 송현동 부지를 매각하면, LH는 이곳을 서울시 시유지와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LH가 매매계약과 교환계약을 각각 체결한다. 지난 27일 이 같은 내용의 국민권익위원회 조정 절차가 완료됐다.
↑ 28일 찾아간 송현동 부지. 입장이 제한된 안쪽으로 잡초가 우거져있다. [사진=하서빈 인턴 기자] |
대규모 기증에 특별관으로는 부족할지도…미술관 건립 검토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 자료를 보면, 국보 216호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보물 1393호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 등 국가지정문화재 60건을 포함해 김환기·나혜석·박수근 작가의 미술품, 모네·고갱·르누아르·샤갈·달리 등 해외 거장의 작품이 다수 있다. 2만3000점이 넘는 대규모 기증인 만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수장고도 부족하고 이번 기증을 계기로 문화재 기능이 가속화될 가능성도 있어 미술관과 수장고 건립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도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미국 뉴욕을 대표하는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같은 상징적인 곳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을 국가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는 게 최선일지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오랜 기간 논쟁 끝에 이제 막 공원화가 확정된 송현동 부지를 활용하자는 주장은 아이디어 차원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가 곧장 제시될 만큼 수십년 풀숲으로 잠들어 있던 송현동 부지가 시민들 품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는 점은 명백해 보였다.
↑ 28일 오후 송현동 부지 인근 주택가의 모습. 방치된 내부에서 자란 풀들이 벽을 타고 외부로까지 나와있다. [사진=하서빈 인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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