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결단력', '뚝심', '의리'···
재계 관계자들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언급되는 대표적인 수식어들이다. 김승연 회장은 1981년 회장 취임 이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업 구조를 지속적으로 재편하며 성공 신화를 이어갔다. 취임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젊은 회장님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회사를 키워나갔다. '인수합병(M&A)의 귀재' 답게, 수많은 M&A를 성공시키며 그룹을 성장시켰다. 1982년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했다. 이어 1985년 리조트, 1986년엔 유통업에 진출했다. 역시 M&A를 통해서다. 이같은 사업확장을 통해 1987년 한화그룹 자산 증가율은 64.4%를 기록했다. 김승연 회장의 30대 시절 얘기다.
1981년 취임 당시 약 1조1000억원이었던 한화그룹 매출은 2019년 71조6000억원을 기록하며 약 65배 가까이 성장했다.
이같은 김 회장의 '승부사' 기질과 '결단력'은 자연스럽게 '스포츠 사랑'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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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1999년 김승연 회장이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고 있는 모습 |
30대 총수는 사업 뿐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했다. 관심을 떠나 '덕' 또한 톡톡히 봤다. 김승연 회장은 회장에 오른 이듬해인 1982년 대한복싱연맹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복싱은 인기 스포츠 중 하나였다. 김 회장은 복싱연맹 얼굴마담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아시아아마추어 복싱연맹 회장과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부회장에 선임되며 한국 복싱의 위상을 올렸다.
특히 김 회장이 1984년 LA올림픽 때 한국 선수들이 판정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동분서주 뛰었던 일은 복싱계에선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 한국 복싱 최고 유망주였던 김광선은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미국 선수 폴 곤잘레스에게 패했다. 김광선이 기억하는 아마추어 공식 전적은 210승 1패다. 1패가 LA올림픽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개최국 미국 복싱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이해 못할 판정이 많았다고 알려졌다. 복싱에선 신준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신 선수의 메달 뒤엔 편파판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김승연 회장의 공도 있다. 30대 초반의 혈기 넘치는 김승연 회장의 리더십은 스포츠에서 발현된 셈이다.
김승연 회장은 대한복싱연맹 회장과 함께 대한체육회 부회장직도 수행하며, 1986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앞서 1982년과 1984년엔 각각 체육훈장 백마장과 맹호장을 받았다. 이밖에 김 회장은 대한민국 체육상과 한국기자연맹 선정 체육상도 수상했다.
김승연 회장은 1982년부터 1997년까지 15년간 복싱연맹 회장으로 한국 복싱 발전에 기여했다. 그런데 그의 스포츠사랑은 복싱에 머물리 않았다. 김 회장은 2002년부터 비인기 종목인 사격을 지원했다. 한화그룹은 2002년 6월부터 대한사격연맹의 회장사를 맡아 지금까지 100억원이 넘는 사격발전 기금을 지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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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2016년 한화회장배 전국사격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한화회장배 사격대회'는 국내 5대 메이저 사격대회 중 하나다. 김승연 회장이 비인기 종목인 사격 활성화를 위해 2008년 창설한 이래 국내 최고의 전국 사격대회이자 기업이 주최한 최초이자 유일한 사격대회다. 재계 관계자는 "한화의 지원이후 사격협회가 체계화됐고, 대표선수들이 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문화도 형성됐다"고 전했다.
◆재계의 야구광 김승연 회장
김승연 회장의 스포츠 사랑 백미는 단연 야구다. '야구광'으로 소문난 김승연 회장은 한화이글스 지분 10%를 지난 1993년부터 27년째 보유하고 있다. 10대 그룹 총수 중 야구단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건 김승연 회장이 유일하다.
한화이글스는 1986년 창단했다. 창단 당시 한화는 한국야구위원회(KBO) 회원 가입 명목으로, KBO의 본부인 야구회관(양재동 소재)을 건립 기증했다. 앞서 고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 회장은 1980년 북일고등학교 야구팀이 창단 3년 만에 봉황기와 화랑기 대회에서 우승하자, 그룹 차원의 야구단 창단을 약속하기도 했다. 천안 북일고등학교는 한화그룹이 운영하는 학교다.
한화이글스는 한국시리즈 우승 1회(1999년), 준우승 5회(1988년, 1989년, 1991년, 1992년, 2006년)를 기록했다. 김 회장은 1999년 한화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했을 때 선수들을 끌어안고 기뻐하며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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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김승연 회장이 한화이글스 선수들과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뻐하고 있는 모습 |
김 회장은 야구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2011년 경기장을 방문했을 때, 김태균 선수를 데려와 달라는 관중석의 외침에 "김태균이 데려올게"라는 육성으로 화답한 것은 야구팬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일화다.
실제 김승연 회장은 이듬해 김태균을 한화로 데려왔다. 김성근 감독 선임을 촉구하는 팬들의 반응에도 귀를 기울여 그를 감독 자리에 앉혔다. 박찬호와 조성민 등 한 때 미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선수들의 은퇴 전 마지막 팀 또한 한화였다.
중독성 있는 경기를 펼친다는 의미로 '마리한화'라는 별칭을 얻은 한화이글스가 11년만에 가을 야구에 진출한 지난 2018년 김 회장은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 관람을 위해 경기장을 찾아 선수단을 격려하고 팬들과 함께 한화를 응원했다. 특히 이날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전 좌석에는 승패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한화이글스를 응원해 준 팬들의 성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장미 1만3000여송이가 놓였다. 오랜만의 가을야구 홈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감동의 장미꽃을 손에 들고, 김승연 회장에게 환호와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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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연 회장이 2018년 한화이글스의 준풀레이오프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
김승연 회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 "다음달 국가적 대사인 평창동계올림픽이 개최되고, 새해를 맞아 대한민국이 세계중심에 서는 행사인 만큼, 우리도 적극 동참해 힘을 보태야 한다"고 말했다.
한화그룹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가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에서 활용될 불꽃행사와 성화봉 등을 지원했다. 올림픽 개최 D-500, D-365, D-100,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개·폐막식 등 총 35회에 걸쳐 불꽃행사를 지원했다. 아울러 올림픽 대표 상징물인 성화봉도 9640개를 제공하는 등 총 250억원 상당을 후원했다.
특히 한화가 만든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은 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의 해발 700m 고도를 상징하는 700mm 크기로 제작됐다. 다섯 갈래의 불꽃 모양을 상단에서 이어주는 형태의 금빛 배지는 대회 슬로건 '하나된 열정'을 표현했다. 하단부의 캡은 군사분계선(DMZ) 철조망을 녹여서 만들어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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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진정필 한화이글스 선수가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한화는 치료비와 장례를 지원했고, 2011년엔 최동원 2군 감독 사망 때, 그룹 차원에서 적극 지원 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2008년엔 기관지 파열로 올림픽 경기 도중에 기권한 복싱 백종섭 선수를 지원했다. 2008년은 김승연 회장이 복싱연맹에서 손을 뗀지 10년이 넘은 해다. 스포츠에 대한 애정과 의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20년은 김승연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한 지 40년이 되는 해로, 한화는 재계 7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승연 회장
다음편에서는 김승연 회장 장남인 김동관 (주)한화·한화솔루션 부사장의 스포츠 이야기가 예정돼있다.
[정승환 재계·한상 전문기자 / 도움 = 정지규 경일대 스포츠학과 교수 겸 스포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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