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 시장 공략에 집중했던 대우그룹은 199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8년 말 대우그룹은 계열사 41개, 국내 종업원 10만여명, 해외법인 396개를 거느린 재계 순위 2위 기업이었다. 특히 해외 고용인력이 25만여명에 달할 정도로 많아 대우그룹의 해외 경영은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해외시장 진출이 가속화될수록 대우그룹의 자금난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대우그룹의 세계 경영은 공산권 국가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저개발 국가가 대상이었다. 사업 초기 많은 자본이 들어갔지만 단기간에 이익을 내기 어려웠다. 업계에 따르면 대우그룹이 몰락하기 전까지 돈을 제대로 버는 해외사업장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대우그룹은 투자금 확보를 위해 1990년대 중반 이후 채권 발행을 늘렸고 결국 부채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1997년 말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금리가 연 30% 가까이 뛰어오르자 차입경영을 지속해왔던 대우그룹의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달러당 원화 환율이 2000원까지 급등한 것도 해외채무가 많았던 대우그룹 입장에서는 악재였다. 외환위기와 함께 국내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이어지가 금융권이 대출금 회수를 서두르기 시작하면서 대우그룹의 경영난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1998년 대우차와 제네럴모터스(GM)과의 합작 추진이 흔들리고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유동성 위기는 현실이 됐다.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지만 외환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외환위기 당시 긴축경영을 하던 다른 기업과 달리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하고 고금리 자금을 끌어들이는 등의 외형확대에 치중했다. 결국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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