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유출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 기업이 미국 법원과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상대측을 제소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보다 미국 법 체계가 관련 증거를 확보하는 데 더 수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미국 법원에 있는 제도가 소송을 제기한 측에 유리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10일 화학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최근 미국 ITC에 SK이노베이션의 2차전지 셀, 팩, 샘플 등의 수입을 전면 금지해달라고 요청하고,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 혐의로 제소했다. SK이노베이션이 2차전지 사업을 육성하겠다고 나선 지난 2017년부터 LG화학의 2차전지 관련 핵심 기술이 다량 유출된 구체적 자료들을 발견했다는 게 이유다.
앞서 제약·바이오업계에서도 국내 최초로 보툴리눔톡신(일명 보톡스) 제제를 출시한 메디톡스가 후발주자인데도 미국에서 먼저 보툴리눔톡신 제제의 시판 승인을 받은 대웅제약을 ITC에 제소했다. 메디톡스는 수년 전부터 대웅제약이 자사의 보툴리눔톡신 균주와 생산기술을 유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보타를 개발했다고 주장하며 국내외에서 법적분쟁을 벌이고 있다.
LG화학과 메디톡스 측은 미국에서 소송전을 벌이는 이유로 '강력한 증거개시(Discovery) 절차'를 꼽았다. 증거개시 절차란 소송 당사자가 보유하고 있는 소송 관련 정보·자료를 상대방이 요구하면 제출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양측 소송 대리인들에게 증거 자료에 접근하는 걸 허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상대 측이 요구한 자료가 해당 기업의 기밀이더라도 법원에 제출해야 하며 소송 대리인은 이를 열람한 뒤 누설하면 안 된다는 규정도 포함돼 있다.
법조계에서는 미국의 증거개시 절차가 소송을 제기한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지 알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증거개시 절차는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한 제도라는 이유에서다. 재판이 진행되는 초기에 세운 전략이 빗나가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봉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거개시 절차를 활용해 재판이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하려면 초반에 증거를 모두 요구해야 한다며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는 특정 자료를 요구해도 증거개시 절차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사소송에 증거개시 절차가 없는 한국 법원에서는 새로운 증거 요구를 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재판이 지연되고, 그 시간동안 기술의 효용이 다할 수 있다
한편 제소당한 기업 측에서는 정당하게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영업해왔다며 미국에서의 문제 제기로 국익 훼손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또 경쟁 제품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 사용하는 통상적 방어 전략이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도 나온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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