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 볼보코리아] |
볼보 크로스컨트리(V90)를 2년 전 처음 봤을 때 머리에 맴돈 단어다. 경계인은 바탕이 서로 다른 문화·사회·집단의 경계선상에 있어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양쪽을 소통시키는 역할도 담당할 수 있지만 "너는 어느 쪽이냐"며 소속을 강요하는 세상에서는 소외받거나 차별을 당해 죽임까지 당하는 주변인이다.
크로스컨트리의 베이스 모델인 왜건도 그랬다. 국내 자동차시장의 두 축인 세단과 SUV 중 어느 쪽에도 명확히 소속되지 못한 경계차(境界車)다. 실용성을 강조한 투박한 디자인 탓에 유럽과 달리 국내에서는 못생긴 짐차로 여겨졌다. 차를 사회적 위상과 결부시켜 차는 낮고 폼 나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던 것도 왜건을 서럽게 만들었다. 결국 국내 자동차시장은 '왜건의 무덤'이 됐다.
왜건이 천대받자 유럽에서 인기높은 왜건(형)을 가져온 수입차 브랜드들도 왜건이라는 명칭을 자제하고 투어링, 에스테이트, 클럽맨, 아반트 등으로 홍보했다.
홍길동 전에 나오는 '호부호형(呼父呼兄)'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브랜드 명칭 전략을 사용한 셈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서자 출신 홍길동처럼 왜건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세단이라 부르지 못하고, SUV라고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볼보가 '왜건의 무덤'인 된 국내 자동차시장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세상을 향해 통쾌한 일격을 날리고 이상향 '율도국'을 세운 홍길동처럼 크로스컨트리로 왜건(형)을 홀대하던 국내 자동차시장에 일격을 가했다.
실제 크로스컨트리는 홍길동처럼 기존 질서 파괴자이자 새로운 질서 창조자이기도 하다. SUV, 세단, 왜건, 해치백, 쿠페 등이 뒤섞여 기존 장르로는 정확히 분류하기 어려운 차를 '세그먼트 버스터(Segment Buster)'라고 일컫는다. 장르를 파괴했다는 뜻이다.
세그먼트 버스터는 두 가지 이상 목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등장한다. 음식으로 치면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라는 고민을 해결해 준 '짬짜면'인 셈이다. 장르 파괴 자동차가 아니라 창조적 성향을 갖춘 '퓨전카'로 부르기도 한다.
세그먼트 버스터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함께 경제활동 인구가 늘어나고, 맞벌이 가정 증가와 대가족 해체라는 사회적 현상이 심해지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자동차 브랜드도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가 결합되고,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크로스오버 모델을 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다.
볼보는 세그먼트 버스터 크로스컨트리(V90)로 국내 시장성을 확인한 뒤 3월부터는 두 번째 모델인 크로스컨트리(V60)를 내놨다. 출발은 좋다. 지난달 중순부터 사전예약에 들어가 13일 기준으로 1300대 가량 계약된 상태다.
볼보는 신형 크로스컨트리 출시에 힘입어 올해 목표를 1만대로 잡았다. 이 중 20% 정도를 크로스컨트리로 채운다는 계획이다.
상황도 좋다. 2010년대 들어 왜건처럼 투박했던 SUV가 폼 나고, 실용적이고, 다이내믹한 매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모델로 변하면서 세단 독주 체제가 세단과 SUV 양강 체제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차체 낮은 세단에 치였던 크로스컨트리를 달리 보게 만드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세단과 SUV 대세가 오히려 식상함을 유발하면서 두 차종의 장점을 모두 갖춘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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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보의 상징인 아이언 마크가 없더라도 S90, XC60 등 볼보의 세단·SUV 모델과 같은 디자인 정체성을 유지해 한 눈에 '볼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토르의 망치'로 부르는 LED 헤드라이트, 아이언 마크가 삽입된 그릴은 형님격인 크로스컨트리(V90)를 연상시킨다. 낫 모습으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파고 든 리어 램프도 닮았다.
전장은 기존 모델보다 150mm 늘어난 4785mm, 전면 오버행은 71mm 줄어든 872mm, 휠베이스는 100mm 늘어난 2875mm다. 형제차이자 SUV인 XC60와 비교하면 전고는 155mm 낮아졌다. 전장은 95mm, 휠베이스 10mm, 리어 오버행은 87mm 각각 늘었다.
인테리어도 먼저 나온 모델들처럼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다. 태블릿PC를 닮은 세로형 9인치 디스플레이는 터치 감도가 우수하다. 장갑을 낀 손으로도 조작할 수 있다. 추운 날씨를 감안해 장갑 낀 손으로도 각종 버튼을 쉽고 빠르게 조작할 수 있었던 아날로그 볼보 모델들의 전통을 계승했다.
다만 실내온도, 시트 열선·통풍 등을 작동하기 위해서는 버튼 방식과 달리 터치를 여러번 거쳐야 하기 때문에 조작 편의성은 아날로그 방식보다 떨어진다.
전반적으로 인테리어는 이케아로 유명한 스웨덴에서 태어난 모델답게 오랫동안 봐도 질리지 않은 심플함과 기능성에 초점을 맞춘 스칸디나비아 감성을 지녔다.
고급형인 프로 트림에는 운전석 및 조수석에 마사지 기능이 포함된 최고급 나파(Nappa) 레더 시트를 채택했다. 영국의 하이엔드 스피커인 바워스&윌킨스(B&W, Bowers & Wilkins)를 탑재해 '달리는 콘서트 홀' 기능도 추구했다.
실내공간도 여유롭다. 실내공간을 결정하는 휠베이스는 2875mm로 기존 세대보다 100mm 늘어났다. 리어 오버행도 118mm 증가한 1038mm다. 이를 통해 앞좌석은 10mm, 뒷좌석은 45mm의 레그룸을 추가로 확보했다.
다만 4륜구동 모델이어서 2열 중앙을 가로지르는 센터 터널이 올라와 있어 성인 3명이 타기에는 불편하다. 성인 2명과 어린이 1명은 여유롭게 앉을 수 있다.
트렁크 공간은 기본 529ℓ에서 최대 1441ℓ까지 확장할 수 있다. 간단한 발동작만으로 트렁크를 여닫을 수 있는 핸즈프리 전동식 테일 게이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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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는 단단한 편이지만 몸을 안정적으로 잡아준다. 기존 V60보다 지상고가 높아진 덕에 운전 시야는 넓다. 시동버튼은 다이얼 형태다. 엄지와 검지로 비틀듯이 좌우로 돌려 시동을 걸고 끈다. 드라이브 모드는 에코, 컴포트, 다이내믹, 오프로드, 개인 5가지로 구성됐다. 드라이브 모드는 손가락으로 버튼을 굴려서 조작한다. 팔꿈치를 몸 뒤로 재껴서 조작하기 때문에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금방 익숙해진다.
컴포트 모드에서는 부드럽게 주행한다. 저·중속에서는 가속페달에 발이 닿으면 바로 반응할 정도로 반응성이 우수하다. 스포츠 모드로 바꾸면 가속 질감이 향상된다. 치고 나가는 맛은 부족하지만 답답한 수준은 아니다. 패밀리카를 지향했기에 부드럽고 매끄러운 주행 성능을 추구했다.
소음·진동은 프리미엄 세단 수준으로 적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에서는 어쩔 수 없이 노면소음이 크게 들리지만 일반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소음을 잘 차단한다. 과속방지턱을 넘은 뒤 발생하는 여진도 잘 흡수한다. 승차감은 세단 모델인 S90과 비슷할 정도로 우수하다.
'안전의 대명사' 볼보가 만든 모델답게 안전성도 뛰어나다. 얇은 두께에서도 초고장력강의 강성을 내는 붕소강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탑승자는 물론 외부의 사람들까지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인텔리세이프(IntelliSafe) 시스템도 탑재했다.
자동 제동 기능과 충돌 회피 시스템을 결합해 잠재적인 사고 시나리오에서 포괄적인 안전을 돕는 시티 세이프티(City Safety)가 전 차종에 기본 적용됐다.
앞차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140km/h까지 주행할 수 있는 파일럿 어시스트 II, 도로 이탈 완화 기능, 반대 차선 접근 차량 충돌 회피 기능, 사각지대 정보 시스템 등 첨단 안전 기술도 기본 장착됐다.
이를 기반으로 더욱 까다로워진 유로앤캡(Euro NCAP) 안전 테스트에서 최고 등급을 받으며 볼보 전 차종 별 5개의 기록을 계승했다.
미세먼지 고통을 덜어주는 웰빙·힐링 기능도 갖췄다. 실내 공기를 모니터링한 뒤 먼지, 꽃가루 입자 악취 등을 걸러내고 오염 수준에 따라 외부 공기 유입을 조정하는 실내공기청정 시스템(IAQS) 및 클린존 인테리어 패키지를 적용했다.
가격과 보증기간도 매력적이다. 국내 판매가격은 T5 AWD가 5280만원, T5 AWD 프로가 5890만원이다. 볼보코리아는 같은 옵션을 적용한 T5 AWD가 독일에서 7630만원, 영국에서 6890만원에, 본고장인 스웨덴에서 5890만원에 각각 판매된다고 설명했다. 무상 보증 및 소모품 교환 서비스 기간은 업계 최고 수준인 5년 10만km다.
크로스컨트리는 세단의 편안함, 4륜구동 SUV의 실용성, 볼보의 자랑인 안전성 등을 모두 갖추고 외모도 진일보했다. 세단과 SUV의 단순한 결합(+) 수준에서 벗어나 시너지(x)까지 창출하는 패밀리카로 진화한 셈이다.
볼보는 국내외에서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렉서스, 인피니티, 재규어 랜드로버 등 수입 프리미엄 브랜드와 경쟁하지만 크로스컨트리의 경우 국내에서는 경쟁 차종이 없다. 반대로 프리미엄 브랜드
세단이냐 SUV냐를 놓고 고민하던 소비자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덩달아 '경계차' 크로스컨트리(V60)의 등장으로 세단과 SUV는 '경계'해야 할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디지털뉴스국 최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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