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개발 신약을 잇따라 내놓으며 질적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한국 제약업계가 임상 데이터 축적이라는 벽을 만났다. 의사들은 임상 데이터가 풍부한 약을 선호하지만, 아직 다국적 제약사에 비해 국내 제약사들은 임상시험에 투입할 자금력과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17일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상위 100대 의약품 품목 중 국내 제약사의 제품은 41개로 4년 전인 2012년의 43개에서 2개 줄었다. 같은 기간 청구액은 1조3037억원에서 1조1502억원으로, 100대 품목의 약품비 중 점유율은 41.1%에서 34.4%로 각각 축소됐다.
제약바이오협회는 국내 제약사의 점유율이 감소한 개발한 신약의 시장 진입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꼽았다.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의약품을 대형병원 처방 리스트에 등재하려고 해도 병원 측이 많은 임상 데이터를 요구하면서 시장 진입이 지연된다는 것이다.
다국적 제약사의 경쟁약이 있는 상황에서 국산 신약의 시장 진입이 지연되면 '사용례 부족→매출·청구실적 저조→투자비 회수 장기화→적응증 확대를 위한 임상시험 지연→시장점유율 확대 한계'의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제약바이오협회는 지적했다.
실제 국산 1호 혁신신약(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약)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표적항암제 올리타를 개발 중이던 한미약품은 경쟁약인 다국적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에 밀려 최근 개발을 포기했다. 올리타에 대한 3상을 마치려면 1000억원 가량의 개발비가 더 필요하지만, 이를 투자해 3상을 마쳐도 타그리소의 들러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당초 한미약품은 타그리소에 앞서 올리타의 임상을 시작했고, 독일의 다국적 제약사 베링거인겔하임에 기술수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링거인겔하임과의 계약은 해지됐고, 개발 속도도 타그리소에 추월당했다. 한국에서는 타그리소에 앞서 보험급여 목록에 등재되기도 했지만, 환자·의료진은 글로벌 임상 현장에서 더 많은 데이터를 갖고 있는 타그리소를 선호했다.
국산신약 28호인 일동제약의 베시보도 고전하고 있다. 베시보는 B형간염 치료제로 국내 의약품 시장 최대 품목인 길리어드사이언스의 비리어드와 비슷한 기전(약이 몸 속에서 작용하는 과정)을 갖고 있다.
일동제약 측은 효능은 비슷하면서 부작용을 줄였다고 강조하지만, 지난해 5월 출시된 뒤 연말까지 4461만원의 처방액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10월 출시된 동아에스티의 비리얼(비리어드 복제약)이 3달동안 기록한 처방액 1억1300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약업계에서는 일동제약이 강조하는 베시보의 부작용 개선 효과가 비리어드의 특허 기간이 만료되는 동안 쌓인 임상 데이터를 넘어설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제약바이오협회는 공공의료기관의 처방의약품 목록에 국내 개발 신약을 의무 등재하거나 우선입찰제도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임상에서 사용될 기회를 늘려 국산 신약들이 시장에 안착할 가능성이 높여주자는 것이다.
국내 제약사들이 성장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임상 시험 노하우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경험을 쌓을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 전까지 신약 개발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국내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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