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이 첫 단추부터 '날치기'로 시작됐다.
신고리 5·6호 공사 일시 중단의 1차적인 책임은 안건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에 있지만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른 데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라는 지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한반도 배치와 관련해 민주적·절차적 정당성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해온데 반해 탈원전과 관련해서는 법적 근거와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채 '제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14일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전날 경주 본사에서 노조 반발로 무산된 이사회가 이날 경주 스위트호텔로 장소를 옮겨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기간 중 공시 일시중단 계획'을 기습 의결했다. 이날 이사회에는 이관섭 한수원 사장을 비롯한 이사 13명이 모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 이사회는 이 사장을 비롯해 남주성 상임감사, 전영택 기획부사장, 전휘수 발전부사장, 윤청로 품질안전본부장, 이용희 사업본부장 등 6명의 상임이사와 외부인사인 조성희 에너지자원산업발전연구회 이사, 류승규 전 국회의원, 이진구 전 경주시의회 의장, 조성진 경성대학교 에너지학과 교수, 이상직 한국산업기술진흥원 비상임이사, 서정해 경북대학교 경상대학장, 권해상 전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공사 등 7명의 비상임이사로 구성됐다. 한수원 측은 찬성과 반대가 각각 몇 표씩 나왔는지 공개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이사들이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수원 이사회가 노조와 지역주민, 일부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사 중지 안건을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점에서 향후 상당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공사 중지를 의결할 경우 이사진 전원을 배임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공언했던 한수원 노조는 이날 "국가의 중요 정책결정을 이렇게 졸속으로 '도둑 이사회'로 결정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강경 대응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한수원 측은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공사 일시 중단이 공익적 판단에 따라 적법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만큼 한수원 이사회 결정에 법적 책임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노조가 이사진을 배임으로 고발하겠다고 한 것은 공사 중단에 따른 업체들의 손해배상 책임을 한수원이 모두 부담해 회사에 큰 손실이 발생할 경우"라며 "정부가 공론화 과정에서 업체와 지역에 대한 피해보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한 만큼 회사 측 손실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원전 찬성 쪽에서는 정부의 탈원정 정책 추진 방식이 잘못됐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안전 문제나 절차적 하자가 없다면 원전 건설을 중단할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달랑 한 장짜리 협조요청 공문을 보내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을 사실상 '지시'한 것은 문 대통령이 강조한 절차적 정당성과 전혀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선언 한 마디에 제왕적인 조치로 탈원전이 진행되고 있다"며 "소수 비전문가들이 제공한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탈원전 정책이 국민 생활과 국가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염려했다.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원전, 거짓과 진실' 토론회에서 "원전 발전 정책과 관련해 법적 근거나 절차적 정당성 없이 일방적으로 탈원전을 선언하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전 국민의 70%가 찬성하는 사드 배치는 민주적·절차적 정당성이 꼭 필요하다고 해 놓고 정작 원전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가를 공론화위원회는 이르면 24일께 출범할 전망이다. 정부는 현재 9명의 위원 선정절차에 착수해 1차 후보군 24명을 추리고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원전 찬반 대표기관에 제척 기회를 주고, 제척 의견이 들어온 인사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자 중에서 국무총리가 최종 선정한다.
위원회는 최대 3개월의 일시중단 기간 설문조사, TV 토론회 등을 통해 여론을 수렴한 뒤 시민 배심원단이 공사를 영구 중단할 지, 아니면 재개할 지 최종 판단을 내리게 된 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찬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위원회 구성의 공정성, 지나치게 짧은 공론화 기간 등 한계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시민 배심원단의 최종 결정이 나와도 이에 승복하지 않고 갈등을 더욱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새 정부는 기존 에너지와 관련된 국가정책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며 "전문성이 요구되는 국가정책을 비전문가인 시민 배심원에 의사결정을 맡김으로써 이념몰이식 포퓰리즘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재만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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