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대변인 역할을 해온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창립 56년만에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
전경련은 오는 17일 이사회, 23일 연례 총회를 통해 회원사들의 신뢰를 회복해보겠다는 계획이지만 전망은 녹록치 않다.
삼성과 LG그룹이 탈퇴했으며 현대차와 SK그룹이 사실상 탈퇴를 선언한 상황이다. 공개적으로 탈퇴를 천명하지 않은 기업들도 이사회나 총회 이후엔 이탈해 해체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전경련이 사라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재계, 특히 중견그룹 이상 규모의 기업들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창구로써의 기능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얘기다.
해체 직전의 비상 상황을 타개할 후임 회장으로 한때 거론됐던 한덕수 전 총리,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오영호 전 코트라 사장 등도 전경련 해체는 정답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상법개정안 등을 비롯한 각종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등 재계에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며 "환골탈태를 통해 전경련이 '일하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후임 회장 주도로 대폭의 인적·조직 쇄신을 통해 하루 빨리 혼선을 끝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덕수 전 총리는 "반기업 정서 등이 확산되는 등에 대응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개별 기업이 하기는 어렵다"며 전경련이 재계의 입장을 대표할 경제단체로써 역할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없는 상황에선 정치논리에 휩쓸린 정책을 제어할 수 없고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에 부담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전경련이 기능 정지된 상황에서 대선을 앞두고 날로 거세지고 있는 기업 관련 각종 규제 등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재계에서도 쏟아지고 있다. 당장 다중대표소송제와 전자투표제 의무화 등 상법개정안 관련 국회 논의에서도 재계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10대그룹 한 관계자는 "대한상의가 의견을 내고는 있다"면서도 "대중소기업이 모두 회원사로 있고 산자부와 관계 등도 고려해야하는 게 상의 입장이라 법안의 직접적 타겟이 되는 대기업들 입장에선 답답한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윤증현 전 장관은 "권력이 악용해서 그렇지, 전경련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며 민간 경제외교를 담당하는 기구로의 변신을 주문했다. 윤 장관은 "기업인들을 한데 묶는 구심점 역할을 전경련이 해야할 것"이라며 "특히 대외적으로는 민간외교에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대한상의·무역협회 등 경제단체들이 주요 국가들을 나눠 민간경제외교를 담당하고 있다. 전경련은 미국과 일본 등을 선진국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선진국 기업들과 어깨를 견줄만한 대기업들이 전경련에 속해있다는 이유다. 그러나 전경련과 주요 기업들이 특검 등에 방어모드로 돌아서면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간 민간 경제 외교 역시 전면 중단된 상황이다.
오영호 전 코트라 사장은 전경련 쇄신의 한 방법으로 기능별 기구로의 변신을 제안했다. 전경련의 조직을 나눠서 인사(HR), 마케팅, 통상 등 직능별 전담 본부를 신설해 대기업의 의견을 전달하자는 얘기다. 오 전 사장 역시 전경련의 기능으로 민간경제외교 역할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게이단렌(經團聯) 등과 파트너십 등은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다"며 "전경련의 기능을 조정해서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전경련의 기능 변화와 함께 신뢰 회복을 위한 자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윤 전 장관은 "정치권의 악용도 문제지만 전경련과 재계에서도 스스로 악의 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문제가 된 사회공헌 기능을 대폭 축소 혹은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 자금모집 창구 역할, 어버이연합을 비롯해 각종 단체들에 대한 편법지원 등에 전경련 위기의 출발점이 모두 사회공헌을 담당하는 사회본부다. 전경련의 사회공헌 사업을 기록한 사회협력회계는 2015년의 경우 274억원을 지출했지만 감사보고서 등에 등장하는 설명은 단 세줄에 불과할 정도로 불투명한 집행으로 회원사들로부터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4대그룹 고위 임원은 "개별 기업이 알아서 하면 될 사회공헌 활동을 전경련이 나서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꼬집었다.
사무국 지배구조의 대변화 역시 시급한 변화로 꼽혔다. 이승철 상근부회장의 장기집권과 이에 따른 사무국 사조직화 등을 막을 수 있는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는 회원사들의 이사 파견 및 외부 감사 및 사업내역 공개 등을 도입 등도 검토할만 하다. 한 전 총리는 사무국 중심의 지배구조가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 한 전 총리는 "회원사들의 의견이 적극 반영될 수 있고 또 운영상에 투명성이 담보될 수 있도록 조직구조를 손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재계에서는 다른 경제단체와 통합 등에 대한 의견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 게이단렌처럼 경총과 통합을 검토해볼만하다"고 전했다. 게이단렌은 1990년대 후반 정치자금지원 스캔들 등으로 홍역을 치른후 조직 개혁의 일환으로 노사문제를 담당해온 '닛케이렌(日經聯)'과 2002년 통합했다. 박병원 경총 회장은 이와 대해 "(통합은) 전경련에서 요청이 오면 그때가서 고민할 문제"라고 답했
전경련이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연구단체로의 전환하자는 제안도 있다. 그러나 경제단체 관계자는 "전경련의 헤리티지와 같은 연구단체 전환이나 한경련과의 통합은 외부에서는 많이들 얘기하지만 정작 회원사인 기업들은 다들 관심이 없어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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