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이 정한대로 금액을 냈을 뿐이다.”
6일 국정조사에서 재계 총수들이 ‘미르와 K스포츠 재단에 왜 돈을 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놓은 설명이다. 전경련이 창립 55년만에 최대의 존립 위기에 직면하게 된 이유는 국정조사에 나선 총수들의 답변 속에 녹아있다. 전경련이 ‘재계의 목소리’를 내달라는 회원사들의 요청보다는 정치권의 자금 조달 창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전경련의 위기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주요 그룹 회원사의 리더십 부재 → 사무국 중심의 독단적인 운영 → 정책제언 약화, 자금모집 등 기능 비대화→ 회원사 이탈 가속화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경련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회장단 회의’다. 회장단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매년 1회 열리는 총회에서 추인만 하는 식으로 주요 의사결정은 회장단회의에서 이뤄진다. 주요 회원사의 회장 18명과 전경련 회장과 부회장으로 구성된 회장단(총 20명)은 격월로 사업에 관한 논의를 위한 회의를 열고 있다.
과거엔 재계를 대표해 정치권을 상대로 할 말은 했지만 현재 이러한 기능은 사라졌다. 이름뿐인 기구가 되면서 참여율 역시 떨어져 매일경제신문 조사에서 전경련 회장·부회장을 제외한 회장단 18명 중 올해 회의에 한차례라도 참여한 사람은 단 4명에 불과했다. 전경련에서 회장단 외연을 넓혀보겠다며 자격을 20대그룹에서 50대 그룹으로 완화했지만 지난해 회장단은 21명에서 20명으로 거꾸로 줄었다. 지난달에 예정됐던 올해 마지막 회의는 열리지도 못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전경련이 창립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리더십 기구인 회장단 회의가 열리지도 못하는 것이 현재 전경련의 위상”이라고 꼬집었다.
회장 역시도 주요 그룹 총수들이 맡기를 거부하면서 매번 ‘사람이 없어’ 연임을 해야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재계의 참여가 떨어지면서 상근 부회장을 정점으로 한 사무국 관료화가 빨라졌다. 이 과정에서 정책 제언 등 재계 목소리 대변기능이 약화된 반면 기업 자금 동원을 통한 사회공헌 부문은 날로 커졌다. 한 전경련 직원은 “내부에서도 정책 연구부서는 찬밥 신세이어서 소외감을 느낄 정도”라고 털어놓을 정도다.
재계에서는 전경련이 미국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싱크탱크로 남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매일경제신문이 지난달 40대그룹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가장 시급한 일로 응답자의 92%가 ‘전경련 역할 재규정 및 조직 변화’를 꼽았다.
[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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