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53)은 유년 시절 TV 만화 영화 ‘우주소년 아톰’을 즐겨봤다. 1970년대 지구 밖을 날아다니는 아톰을 보면서 과학의 힘을 동경했다. 학창 시절에는 생물 수업을 유난히 좋아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생명의 신비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세월이 흘러 회사를 경영하면서 과학의 힘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깨달았다. 1990년대 아모레퍼시픽이 수입 화장품에 밀려 고전하고 있을 때 노화를 방지하는 비타민 유도체 ‘레티놀 아시드’를 화장품에 적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경영난을 일시에 해결했다. 1997년 수백번의 실험 통해 만든 ‘아이오페 레티놀 2500’이 대박난 덕분에 오늘날 ‘K뷰티 신화’를 쓸 수 있게 됐다. 이 제품 기술의 토대는 그의 부친인 고 서성환 선대회장(1923∼2003년)이 1992년 설립한 ‘태평양중앙연구소’에서 나왔다. 1991년 노동조합 총파업으로 회사가 휘청한 후 이듬해에 ‘기업의 미래는 과학에 있다’고 판단한 선대 회장이 만든 연구소다.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쿠션 등 히트 화장품을 만들어온 서 회장이 그 빚을 갚기로 결심했다. 지난 7월 그가 보유한 아모레퍼시픽 주식 3000억원을 기부해 생명 과학 기초 연구를 지원하는 공익법인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했다. 자사 화장품과는 무관한 순수 과학 연구에 거액을 기부해 의미가 깊다.
미국 하워드 휴스 의학 연구소를 벤치마킹한 이 재단은 매년 한국인 신진연구자 3~5명을 선발해 각 과제당 5년간 최대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할 예정이다. 첫 지원 대상자는 오는 11월 공고 절차와 심사 과정을 통해 내년 6월 발표할 계획이다.
서 회장은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재단 출범 기자회견에서 100년 이상 지속가능한 재단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1조원규모까지 사재를 기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붉은 넥타이를 매고 나타난 서 회장은 “시작은 3000억원으로 하지만 제 꿈은 사업을 잘 해서 1조원을 기부하는 것”이라며 “재단이 정상화되려면 1년에 대략 150억원이 들어간다. 100년 이상 과학 연구가 계속될 수 있도록 출연금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이 재단은 서 회장이 오랜 시간 품어왔던 꿈과 소명의 실천이다. 그는 “회사가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과학의 힘을 통해 다시 일어났다”며 “제가 받아온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우리 사회에 반드시 크게 돌려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설립 취지를 밝혔다.
이름을 내건 재단을 만든 이유는 강한 책임감 때문이다. 서 회장은 “재단이 잘못되면 내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기 위해 내 이름을 걸었다”면서 “꼭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고 더
최근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 김준일 락앤락 회장이 공익 재단을 설립하는 등 중견기업에서 시작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실천이 이제 대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지현 기자 / 박인혜 기자 / 박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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