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규 오하이오대 석좌교수 <김호영 기자> |
13일 만난 ‘셰일가스 개발의 선구자’ 이성규 오하이오대 석좌교수(64·사진)은 친환경 에너지가 주목받으면서 셰일가스가 타격을 입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친환경 에너지의 사용이 점점 늘어나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화석연료가 모두 친환경 에너지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1977년 미국에 건너와 젊은 나이인 34세에 애크런대 석좌교수에 오른 이 교수는 1997년 미주리대를 거쳐 2010년 오하이오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교수는 아무도 셰일가스에 관심을 두지 않던 30년 전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셰일가스 추출법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셰일가스가 차세대 에너지원이 될 것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주요 석유기업들은 물 대신 이산화탄소로 셰일가스를 뽑아올리는 이 방식을 도입했다. 전 세계 셰일가스 생산량은 60% 증가했지만 생산비용은 오히려 4분의 1로 떨어졌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3년 미국 과학공학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했다. 이미 회원으로 선정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이 교수는 “특허를 낸 당시만 해도 셰일가스 시장은 없었다”며 “셰일가스 채굴 공법으로 널리 알려진 수평 굴착방식도 태동기였던데다 문제는 이렇게 채굴해도 채산성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셰일가스와 관해 집필한 책이 15~20년 뒤에야 인기를 얻었다”며 “나중에 내 책을 사보겠다고 연락해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언급했다.
셰일가스 개발의 선구자라는 명성을 얻기까지는 많은 어려움도 따랐다. 교수 임용 초기에 12번 연속으로 연구과제 제안서를 거절당하는 좌절감도 맛봤다.
이 교수는 “130개의 각종 연구과제를 수행했는데 제안한 프로포절은 모두 440개였으니 4분의 3은 떨어진 셈”이라며 “프로포절이 떨어지면 위축감을 느꼈지만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준비해 도전을 했다”고 밝혔다.
학자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갑자기 시련이 찾아왔다. 어느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청각장애였다. 학자로서의 큰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2005년 프로젝트 미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왼쪽 귀가 안들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매우 심각한 문제였고 결국 오른쪽 귀까지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두 귀의 청력을 잃어가는 중에도 그는 자신보다 제자들을 먼저 생각했다. 이 교수는 “청력이 죽어가면서 엄청난 고요함이 찾아왔다”며 “청력을 영영 잃는 것보다 당장 다음학기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언급했다.
그는 “다행히 바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재활치료 등엔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회상했다. 강단에 돌아왔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균형감각 이상으로 칠판에 판서를 하고 학생들을 향해 돌아서는 것 조차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강단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제자들이 그의 곁을 지키며 재활을 도왔다.
이 교수는 “연구에만 몰두하다보니 건강을 돌볼 시간이 없었던게 문제였다”며 “힘든 시기에 제자들이 항상 곁을 지켜줬기에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나는 연구자보다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합니다. 학생들과 자유로이 의견을 나누는 것은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큰 특권이죠. 내 힘이 닿는한 교육자로서 강의실에서 제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자 합니다”
[이영욱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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