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년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CEO가 있습니다. 죽염을 세상에 선보이며 연매출 180억 원의 죽염 회사를 설립한 ㈜인산가 김윤세 회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조상 대대로 가내 수공업 형태로 만들어오던 것을 세계 최초로 산업화하며 죽염 시장을 연 김윤세 회장. 그의 이야기를 MBN ‘성공다큐 최고다(최고 경영자의 고귀한 다섯 가지 비밀)’ 제작진이 직접 들어봤습니다.
Q. 4대를 걸쳐 160년 동안 전해져온 죽염... 죽염에 대한 자세한 설명 좀 해주세요.
죽염은 예로부터 약소금으로 많이 쓰였습니다. 천일염을 대나무 통 속에 넣어 구우면 소금 속의 독성이 제거 되는데, 저희 선조들은 그것을 알았죠. 유학자, 의학자였던 저희 집안에서는 죽염으로 많은 사람들을 보살펴왔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왔고요. 어떤 사람들은 소금을 멀리하라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염의 효능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죠. 생명체는 염도가 부족하면 미생물이 침입하여 부패가 됩니다. 그렇기에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질지만, 다만 소금에 함유되어 있는 독성물질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독성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은 바로 고온에 소금을 굽는 것입니다. 죽염은 선조 때부터 내려온 지혜였습니다.
Q. 아버지가 인산 김일훈 선생님이시라고. 꽤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 인산가의 이름도 아버지의 호인 ‘인산’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독립 운동가이자 의학자이셨어요. 의술이 남다른 분이었죠. 저도 여러 번 아팠는데, 아버지 덕분에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남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 의술로 아버지는 아픈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저희 집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죠.
죽염의 원리를 새로이 개발하신 분도 아버지이셨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두 번을 구워 사용했던 죽염을 아버지는 아홉 번을 구웠죠. 그래야 죽염의 약성이 더 살아난다는 것이 아버지의 통찰이었습니다. 지금은 대중들에게 죽염의 창시자로 많이 알려져 계시죠. 아버지의 저서인 신약(神藥), 신약본초라는 책도 유명하죠.
Q. 그 책 작업에는 김윤세 회장님도 직접 참여하셨다고?
제가 아버지 덕분에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고 또 아버지의 뜻을 알리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자가 되었죠. 아버지의 의술 세계와 죽염의 효능 등을 기사화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작업물이 신약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일일이 받아 적으며 작업했는데, 그렇게 준비한 기간이 5년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내용도 어렵고 해서 수십 번을 아버지께 되물어야 했는데, 너무 말귀를 못 알아들어 혼쭐이 나기도 했죠. (웃음) 주위에선 그런 저를 보고 저런 효자가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어쨌든 그 과정이 있었기에 아버지에 대해, 의술 세계에 대해, 또 죽염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신약(神藥)이라는 책에서 “사람을 살리는 세 가지 신약이 있으니 첫째가 죽염이요, 둘째가 홍화씨, 셋째가 산삼”이라고 하셨어요. 그 책이 엄청나게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가면서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운도 좋았던 셈이죠.
Q. 그렇다면 창업의 계기는 무엇인가요?
죽염이 알려지면서 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죽염을 달라는 사람들이 집 앞에 줄을 섰죠. 집에 있던 죽염은 순식간에 동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도 아버지는 죽염을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때문에 집안은 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창업을 결심했어요.
하지만 당찬 결심과 달리 그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죽염 산업이라는 것 자체가 없던 개념이다 보니, 관련 법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부에서는 죽염 공장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법이 없다면 법을 개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부에 법 개정을 요구했죠. 끈질긴 저의 노력으로 1년 만에 공장 설립을 허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인산가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보면 됩니다.
Q. 죽염을 알리셨지만 세상의 반응은 녹록치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위기는 없으셨나요?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위기는 수도 없이 저를 덮쳤습니다. 죽염이 인기를 얻으며 경쟁업체들이 줄줄이 생겨났습니다. 신약이란 책을 통해 죽염 제조과정과 비법을 공유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런 일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죠. 1992년에는 연 매출이 10억 원을 넘고 있었고요. 하지만 이익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죽염을 만들지 않는 업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 죽염시장은 한 마디로 ‘난립’ 그 자체였습니다. 당연히 죽염에는 문제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죽염에서 다이옥신이 나오고 숯가루가 나오는 등의 문제로 정부에서 제제가 들어왔습니다. 다 잘 못된 방법으로 죽염을 제조한 업체들 때문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인산가의 죽염도 같다는 오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매출은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Q.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요?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사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죽염을 비난해도 저는 죽염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으니까요. 사람들의 오해를 푸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저는 공장의 문을 열었습니다. 모든 제조 과정을 공개한 거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정직하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니 사람들은 오해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잡지를 만들고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발로 뛰어다니며 노력하니 서서히 매출이 회복되기 시작하더군요.
Q. 죽염에 대한 연구도 엄청나게 많이 하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인산가 죽염은 서해바다에서 난 천일염을 남해안에서 자란 왕대나무에 넣고 황토로 입구를 막아 굽죠. 그렇게 아홉 번을 굽는데 총 25일이 소요됩니다. 죽염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죠. 아버지는 생선에 마지막 9번째 5000도에 소금을 구워야한다고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저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2002년 인산가 기업부설연구소로 인산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온도를 올리는 일은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15년 만에 1700도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었죠.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천일염 속에 불순물 유해물질을 더욱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고요. 그렇게 3無(無매연, 無다이옥신, 無쇳가루 발생) 시스템을 완성하며 죽염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를 쌓아나갔습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저는 더 연구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도 따르고 싶었으니까요.
Q. 앞으로 목표는?
저는 인산 죽염의 효능을 인증 받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과학적인 입증을 받기 위한 것들이었죠. 중국 중의연구원, 미국 하버드 의대 부석 연구소 등에서 죽염의 효능에 대한 인증을 받아내며 국제적 신뢰도도 이미 확보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죽염은 항종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