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우스트 되기’ 게임에 열중한 참가자들 |
인문학의 위기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일명 ‘돈이 되는 것’을 쫓는다. 대학교 입시를 치르면 느낄 수 있듯이 문과 쪽 지원자는 경영·경제학과로 몰려 커트라인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반면, 인문학부 계열의 선호도는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위기를 역발상으로 다가선 이가 있다. 인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고전 문학을 게임으로 발전시킨 것. 그 주인공은 ‘놀공 발전소’(이하 놀공)의 대표 피터 리(42)다.
놀공은 1년여 간 독일문화원과 협력해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지고 ‘Being Paust'(파우스트 되기)라는 게임을 만들었다. 피터는 독일문화원이 괴테문화원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서 게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면서 이 게임이 글로벌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요즘 독일 젊은이들마저도 괴테 작품을 대하는 게 예전 같지 않아 다양한 시도를 꾀하던 중 이 계획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독일문화원이 있는 나라라면 이 게임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지난달 31일 독일 외교 장관의 한국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에 놀공도 참가했다. 이 행사에 앞서 피터 리를 만나 놀공의 성공과 계획에 대해 들었다.
◆ 놀이(게임)+공부=놀공
피터는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20년간 생활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후 1995년 타임지를 시작으로 미디어 회사에서 4~5년 정도 일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다가 1999년 말쯤 유태인 친구와 둘이서 게임 랩(Game Lab)이라는 게임 개발사를 세우면서 쌍방향 소통에 주목하게 됐다.
“전통적인 소통 방식은 메시지가 정해져 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게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책을 썼다면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콘텐츠는 완성돼 있죠. 그러나 만약 축구라는 게임을 설계했을 경우 축구장은 있는데 축구를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게임은 누군가가 참여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즉 내가 메시지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와서 무언가를 해줘야 메시지가 완성되고, 나아가 본래 전하고자 했던 그 이상의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죠. 그게 제가 게임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피터는 게임이 가지고 있는 오락기능 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적인 가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2006년 인스티튜트 오브 플레이(Institute of Play)라는 비영리 연구소를 설립해 뉴욕시 교육청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미국의 고등학교 졸업률은 40%가 안되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일이 놀이를 하듯 재미있을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게임을 교육과 접목시켰다. 고등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협업했는데, 그는 이 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러다 게임과 교육을 접목시킨 방식의 교육을 한국에 도입하면 좋겠다고 느끼게 됐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놀이와 공부를 결합해 문화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놀공을 만들었습니다. 변화라고 해서 혁신이나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바꾸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어요. 저희는 주로 기업과 연계한 마케팅을 실시하거나 교육·문화 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합니다. 이전에 없던 문화이기 때문에 실험적이지만, 비즈니스 모델 없는 것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 행사장에서 만난 피터 리 ‘놀공 발전소’ 대표 |
◆ 현대판 파우스트 되기
고전으로 게임을 만든다는 독특한 발상을 하게 된 이유로 그는 ‘관계 맺기’를 꼽았다. 피터는 “책을 좋아하지만 막상 고전은 잘 안 읽게 되더라”며 “콘텐츠는 좋은데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고전을 가지고 어떻게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게임은 결국 본인의 경험”이라며 “게임 참여를 통해 나와 고전 문학 사이에 관계가 생기게 되면 더 이상 나와 다른 게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고전에서는 주인공 파우스트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영혼을 팔잖아요. 하지만 ‘파우스트 되기’에서는 SNS에 등록돼 있는 친구를 팔아 돈을 얻는 것으로부터 게임이 시작됩니다. 이 가상의 돈으로 참가자들은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는 파우스트 책 속 문장들을 구매함으로써 점수를 얻게 되죠. 초반에 참가자들은 진짜 친구를 파는 것도 아닌데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게임이 진행될수록 목표가 생기면서 점점 빠르게 돈과 친구를 맞바꾸게 돼요. 무언가를 희생해야 본인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때문인데, 참가자들은 이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 게임=소통의 매개체
게임 참가자들은 본인이 추구하던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거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달아 나갔다. 각자의 경험에 비춰보니 책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효과로 이어졌다. 이 모습을 본 피터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는 “게임을 통해 고전 파우스트가 던지는 의미를 나와 연관된 무언가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며 “사람들은 게임이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기지 못했을 때 화가 나기 마련이다. 감정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점을 봤을 때 게임은 가상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생소하고 어렵게 느끼게 되지만 하다보면 게임에 푹 빠집니다. 문장을 읽고 멈춰 서서 어떤 선택을 할지 한참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규칙으로 인해 일명 ‘매직 써클’(Magic Circle)에 빠집니다. 그 순간 현실은 없어지고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데, 그 안에서 행동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피터에게 앞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잘 모르겠다. 틀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게임을 하면 성격이 나온다. 게임은 자신을 알게 되는 좋은
“지금은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것을 만들지만 이 현상이 지속되다보면 나중에는 ‘무엇’인가로 불리지 않을까요. 그런 날이 오는 것이 제 꿈입니다.”
[매경닷컴 김지혜 기자 kjh103206@mkinter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