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축은행 추가 영업정지 ◆
20일 오전 11시 부산 해운대구 우동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지점 앞. 5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연방 담배를 피우며 정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굳게 닫힌 문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손엔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받았던 대기표가 들려 있었다. 그는 "추가 영업정지가 없다고 발표한 지 이틀 만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소리를 지르자 여기저기서 푸념이 쏟아져 나온다. 일용직 노동자 김 모씨(56)는 "어떻게 모은 돈인데 이럴 수는 없다"며 가슴을 내리쳤다. 김씨는 지난 18일 부산2저축은행을 찾아 6시간 줄을 서 9000번째 대기표를 받고 21일 돈을 인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업정지로 그의 계획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 부산 지역, 민심까지 악화
= 부산이 패닉에 빠졌다. 부산저축은행에 이어 부산2저축은행까지 영업정지를 받자 부산 시민 사이에는 안심할 만한 저축은행이 없는 것 아니냐는 염려가 확산되고 있다.
부산에서는 그간 부산저축은행이 최고 저축은행으로 통했다. 부산에는 솔로몬, HK, 토마토, 영남(한국 계열) 등 전국 단위 저축은행이 네 곳이나 진출해 있지만 부산 시민은 부산저축은행을 최고로 알아왔다. 실제로 부산저축은행은 5개 계열사의 자산 총계가 10조원을 넘어 국내 최대 저축은행 계열이다.
부산저축은행이 국내 최대 저축은행 계열로 성장한 것은 부산 전체 저축은행 예금의 53%를 몰아준 부산 시민의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부산저축은행의 부산 지역 고객 수는 30만명에 달하고 전체 저축은행 이용자는 50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해운대구 재송동에 사는 이 모씨(49)는 "전국에서 가장 크고 우량하다는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해 저축은행 전체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며 "5000만원까지는 예금자 보호가 된다고 하지만 다섯 군데 저축은행에 분산해 맡겨 놓은 돈 전체를 찾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성난 민심의 밑바닥엔 극도로 악화된 금융당국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뱅크런이 없는 한` `자기자본비율이 5%가 넘는 94개 저축은행 중에는` 등의 단서를 달긴 했지만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상반기 중 더 이상 영업정지가 없다"고 성급하게 선언한 게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모씨(55)는 "부산저축은행에 대해 영업정지 조치를 내리면서 부산2저축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조성렬 부산금융도시시민연대 공동대표는 "금융당국은 부산의 특성을 감안해 좀 더 세밀한 관리를 해야 했는데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뒷짐만 지고 있었다"고 비난했다.
일각에서는 지역경제 전체가 타격을 받으면서 민심 악화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차진구 부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이번 사태가 진정되지 않으면 부산 경제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부산 경제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부산 정서를 감안해서다.
금융당국 담당국장들은 부산에 내려가서 저축은행 관계자와 고객을 만나 의견을 들어보고 필요한 다른 지원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에 대한 파장이 예상보다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인 데 따른 것이다.
◆ 다른 대형 저축은행 상황 양호
= 부산의 뱅크런 행렬은 21일부터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김 모씨는 "이틀 만의 추가 조치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라며 "주변 사람 모두가 돈을 찾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부산 시민은 1990년대 말 부산을 강타했던 `파이낸스 사태` 악몽까지 떠올리고 있다. 1999년 부산에서는 `삼부파이낸스` 회장이 횡령 혐의로 구속된 이후 불안을 느낀 파이낸스 업체 투자자들이 잇달아 중도환매를 요구하면서 업계 전체가 마비된 일이 있었다.
지역의 한 금융권 관계자는 "부산 시민 사이에서는 가장 믿음직했던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전체 업계로 위험이 번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산 내에서는 시민 스스로 자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 진출해 있는 대형 저축은행들은 가입자 달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솔로몬 관계자는 "고객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찾아올 때마다 여러 수치를 보여주면서 안심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며 "처음에는 막무가내였던 고객 중에 수긍하고 돌아가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 부산에 진출한 대형 저축은행들은 사정이 모두 괜찮은 편이다. 부산솔로몬은 BIS 비율이 12.75%로 대형 저축은행 가운데 가장 우수한 편에 속한다.
토마토2저축은행(옛 양풍저축은행)은 토마토가 인수한 지 1년8개월 만에 흑자전환해 지난해 하반기 4억원의 순이익을 냈고 BIS 비율도 8.89%에 이른다. 영남저축은행 역시 BIS 비율 11.91%의 우량 저축은
부산에는 현재 12개의 저축은행 법인이 설립돼 있다. 이 가운데 부산, 부산2는 영업정지됐고 BIS 비율이 5%에 못 미치는 우리는 이미 인수돼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나머지 9곳 가운데 4곳은 전국 규모 대형 저축은행의 계열사고, 나머지 5곳의 중소형 저축은행도 사정이 괜찮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 박동민 기자 / 박유연 기자]